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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락 Aug 13. 2023

11. 정체하다-

그러기 싫지만, 그렇게 되었다.


정체하다 [停 머무를 정 / 滯 막힐 체]
1. (어떤 일이나 상황 따위가) 더 진전되지 못하고 일정한 범위나 수준에 그치다.


첫 진료 때 의사 선생님에게 ‘일을 관둬야 할까요?’라고 물었고, ‘너무 빨리 관두실 필요는 없어요.’라는 답변을 들었다. 병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섣불리 관두지 말라는 뜻이었으나, 그로부터 며칠 뒤 2학기 근무가 어렵겠다고 일찌감치 말해두었다.


서둘러 정리했던 이유는, 수술이 먼저라면 개학시기에 수술을 할 것이었고, 항암을 먼저 한다면 몇 회를 받건 3주에 한 번씩 주사를 맞고 치료로 인한 몸의 변화를 겪으며 많은 사람을 대면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을 지속했다면 최대한 수업에 차질이 없도록 스케줄을 잡았겠지만, 이런저런 변수가 생겨 혹시 수업을 빠지는 날이라도 생기면 동료 선생님들과 학생들에게 방해가 될 것이었다.


몸이 안 좋으니 한두 번쯤 그럴 수도 있지만, ‘병원에 가느라 수업을 못 할 것 같습니다.’라는 문장을 뱉는다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민폐가 되는지 잘 안다. 방학 중에 새 강사를 채용하려면, 행정실 선생님부터 교장, 교감, 교무부장 선생님을 비롯한 면접관 선생님들까지 예정에 없던 업무를 해야 한다. 모든 것이 번거로워지는 상황이다.


1년이 넘는 최종 치료기간을 들었을 때, 학교에 빨리 말해두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제 행정실 부장님이 사직원 양식을 메일로 보내주시겠다기에 학교 노트북을 제출하러 나가야 하니 직접 방문하겠다고 했다. 계약 기간 중 자의로 일을 관두기 때문에 써야 하는 서류였다.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행정실 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작성했다. ‘이름: 호락, 직위: 시간강사, 사유: 개인사정(질병)’을 적고 날짜 아래 서명을 했다.


이후 교감선생님을 만나 뵙고 간단히 인사를 드렸다. 새로운 강사선생님을 뽑으셨다고 했다. 짧은 응원을 받고 교무실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교무실에 불을 켜고, 뜨겁게 데워진 넓은 공간에 에어컨 전원을 눌렀다. - 하지만 달궈진 5층 교무실은 내가 나올 무렵이 되어서야 시원해졌다.


쇼핑백에 서랍 속 짐을 정리하고, 학교에서 받았던 노트북, 마이크, 전자칠판 펜을 서랍 안에 잘 넣어두었다. 그리고 텅 빈 책상을 잠시 바라보았다. 몇 해 동안 기간제로 근무했던 학교를 정리할 때와는 다르게 눈물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교무실 속 내 자리. 일주일 세 번 짧게 출근하는 시간강사로 근무했기 때문에 솔직히 말하면 딱히 정이랄 게 들진 않았지만, 분명 그리울 게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나는 반드시 건강해질 것이지만, 학교라는 곳에 반드시 돌아올 거라는 다짐은 하지 않았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 결국 기웃거리고 있을 공간임은 분명하지만, 요즘 내 인생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보니 사람일은 절대 모르는 거라 여겨진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자리를 잡으리라.




사촌동생 A와 차를 타고 장거리 이동을 할 일이 생겼을 때였다. 내 일을 위해 기꺼이 함께해 준 동생과 오랜만에 수다를 떨 기회를 얻었다. 차 뒤에 우래기와 엄마가 타고 계셨지만 늘 잠이 부족하셨기에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오고 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기에는 나의 일방적인 대화였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끄덕여주는 사람이라, 또 나의 상황을 가장 많이 알고 있으며, 내 지인들의 관계도 다 파악하는 사람이기에, 시간의 순서도 사건의 개연성도 없이 생각나는 대로 툭툭 뱉을 수 있었다.


그중에 동생 A의 친구 이야기가 있었다. 유방암이 생겼으나 모든 치료를 마치고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한 친구의 이야기.


“언니, 그 친구가 힘들었던 게 뭔가 삶이 멈춰있는 기분이 들어서였대. 치료에 집중해야 하니까. 그게 힘들었다고 하더라, 우울하고.“


그랬다. 설명하지 못하는 이 답답함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멈춤’에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좋게 말해 쉬는 시간이지만, 일상이 예전과는 같을 수 없을 터였다.


내게 작년 1년은 아이를 낳고 터널 안에 갇혀 있는 느낌의 그런 시간이었다. 아기를 보며 행복했지만, 서로에게 적응하고 익숙해지던 1년은 내게 결코 짧지 않았다. 엄마라면 다들 느껴보는 시기라지만 때론 몹시 버거웠다. 하루는 너무 짧은데 계절은 더디게만 흐르고, 그럴 때면 참 외롭고 팍팍하다고 느꼈다.


그런 시간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정체’다. 내 삶이 멈추는 것만 같다. - 육아는 시간이 느리게 가더라도 아이의 성장이라는 나아감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 허나 치료는 건강했던 때로 되돌아가야 하는 느낌이 든다. 앞이 아닌 뒤로 가기 위한 여정.


“언니, 그래도 그 친구 지금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 언니도 치료 잘 받고 나면 괜찮을 거야!”


나에게도, 누군가에게, 아팠던 적이 있지만 이제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는 순간이 오겠지.

“정체되었던 때가 있어서 내 삶이 다채로워졌노라고.”



23.08.08. 화요일.

쉬어가라는 하늘의 뜻- 예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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