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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락 Jan 01. 2024

17. 유쾌하다

나를 표현하고 싶은 말-


유쾌하다. [愉 즐거울 유 / 快 쾌할 쾌]
: (사람이나 그 기분이) 즐겁고 상쾌하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나의 그 생각을 곁에서 보고 느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여자라서, 딸이라서, 동생이라서, 아내라서, 며느리라서, 엄마라서, 선생님이라서, 기간제직이라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역할이 있지만, 결코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 세상이 다르게 보이곤 했다.


그런데 ‘원래’라는 것도 없다는 걸, 아니 없어야 한다는 걸 나는 좀 늦게 깨달았다. 그래서일까. ‘난 원래 그래!’라는 말로 시작됐던 부부싸움이 꽤 많았다. ‘처음부터 또는 근본부터‘라는 뜻을 가진 ’원래‘는 새롭게 꾸린 가정에서 두 문명이 충돌하는 원인으로써 큰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이런 사연으로 두 단어 주변에 어떤 설명이 붙어있건, ‘당연’이라는 말도 ‘원래’라는 말도 조심해서 쓰려고 노력한다. 절대적인 건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원래’ 나는, 참 유쾌한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나의 그 유쾌함을 알아주는 이들과 그것을 나누는 일은 더없이 기쁜 일이다. 아주 작은 이야기에 ‘ㅋㅋㅋㅋㅋ’를 붙여주며 서로의 웃음코드가 맞아떨어질 때 느끼는 희열이 있달까.


내게 친구 M과 T는 그랬다. 억지로 웃기려고 하지 않아도 웃게 되고 서로의 칭찬에 인색하지 않으며 무언가를 제안했을 때 기꺼이 수용해 주고 따로 꾸미지 않아도 충분히 편안하다. 내가 원래 그런 사람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그 모습에 어떠한 평가도 내리지 않는다. 그게 늘 고마웠고, 내가 그들에게 현재의 나를 가감 없이 내보일 수 있는 이유다.


H: “날 보러 병원에 오겠다고? 번호표 뽑아, 선착순       두 명.”

M: “나 운전해서 갈 수 있을까?”

T: “널 응원한다!!”

H: “여기 너무 멀어~ 시내에서 보자고 하고 싶은데        면역력 때문에 사람 많은 곳은 조심해야 해..”

T: ”우리 모아둔 돈 많다, 또 호캉스 한 번 가자!“


우리의 계모임은 만남이 이뤄지는 그날 하루쯤 ‘누리는 것’에 맞춰져 있었고, 내 몸상태에 따라 지난봄에 이어 조용한 호캉스를 즐기자는 말에 난 몹시 기뻤다.


그런 그녀들에게 나는 새로 만든 미모티콘을 선보였다. 어깨만큼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회색빛 삭발머리로 바꾸었고, 붉은 입술은 조금 허여멀건한 주홍빛으로 바꾸었다. 덩달아 눈썹도 흐리게 맞추었다.



T: “아, 진짜 너!!ㅋㅋㅋㅋㅋ“

M: ”아 얘 진짜 어쩜 좋아!!ㅋㅋㅋㅋ“

H: ”어때? 지금의 나를 표현해 봤어~ 나 같아?“


그렇게 낄낄거리다가 나에게 빠져든다기에, 잠깐 기다리라며 더 빠지게 해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얼른 어플을 켰다. 장난으로 시작했지만, 예쁜 번호표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만드는 데 시간이 꽤 걸렸어도 아주 멋진 결과물이 나왔고 나는 꽤 흡족했다. 별것 아닌 일에 또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



H: “번호표 나왔다!!!”

M: “쇼 호락!!! ㅋㅋㅋㅋ 호며들었음!“

기다리다 잠이 든 T는 새벽에 눈을 떠 이 친구 재능 좀 보라며 감탄해 주었다.


H: ”9월에 만나!“

M: “응~ 꼭 갈게, 쇼 호락!“

T: “호락아, 고생했어. 1차 항암 마지막 밤 잘 자!“


먼 미래에 주고받을 소소한 우리의 에피소드가 하나 또 만들어졌다. 오래전 함께 찍은 사진을 꺼내 들어 ’이거 몇 년도에 찍은 건 줄 알아? 우리 몇 살이게? 오, 기억력 좋다?‘하며 퀴즈를 내는 추억놀이에 살며시 끼어있겠지.


“이거 뭐게?“

”뭐야 이거!! 쇼호락 티켓이네!!!“

“옛날에 호락이 항암 했을 때잖아!!!” 



23.08.18. 목요일. 밤 10시 40분.

단순한 기억을 넘어 따뜻한 추억이 되는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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