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도 한참 지나간 밤에 집 앞의 한적한 산책길을 달렸다. 낮에는 집으로 돌아가며 들떠 있는 아이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하던 하굣길이었는데, 밤이 되니 한적하니 조용한 나의 산책길이 되었다.
땅을 박차며 공기를 가슴속 끝까지 집어넣는 일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었던가? 몇 달간 몸이 안 좋아서 몸 쓰는 게 조심스러웠다만 기안84가 마라톤을 뛰는 모습을 보고 밖으로 뛰쳐 나왔다.
그동안 안 좋은 물질들이 때처럼 몸 안에 끼어 있었을 것이다. 오랜만의 달리기는 폐 안에 고여있던 오래된 노폐물을 깨끗한 새것으로 모두 갈아끼우는 기분이었다. 폐포의 끝에 도달한 신선한 산소는 혈관을 따라 온몸 구석구석으로 운반될 것이다. 몰아쉬는 숨을 통해 느낀다. 미칠 듯이 뛰는 심장을 통해 새로움이 나의 온몸으로 퍼져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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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은, 아주아주 가끔씩은 좀 특이한 짓을 해보곤 한다. 가만히 누워서 움직이지 않고 나의 얼굴과 손끝, 발끝까지 감싸고 있는 존재를 느껴본다. 미세하게 속눈썹을 건드리고 지나가는 방 안 공기의 대류. 사실 공기의 느낌을 감각적으로 알아차리기엔 몸의 습관이 만들어져 있고 기압의 압력 탓에 공기의 존재를 인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내가 공기에 둘러싸여 있음을 인식하려고 노력해 보곤 한다.
상상을 한다. 이 방 안에 갑자기 물이 차오르기 시작해서 방안 가득 물이 찬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한다. 공기가 차 있던 공간에 물이 공기를 몰아내기 시작한다. 내 몸 안에 공기가 차 있던 곳곳으로도 물이 들어차기 시작할 것이다. 폐로 물이 들어가 숨 쉬지 못한다는 고통, 숨 쉬려하는데 물이 들어차는 고통은 경험해 보지 않았어도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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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다"라는 말이 있다. 사전에서는 생활에서 뭔가 좋은 것을 만끽할 때 쓴다. 천수를 누리다, 행복을 누리다, 자유를 누리다, 특혜를 누리다.
사전의 용례와는 다르게 나는 특별하지 않은 바로 지금의 지나가는 순간도 누릴 수 있는데. 가을이 되면 파란 하늘을 누린다. 한반도에 뿌리를 내린 우리의 조상들도 5천 년이 지나는 동안 매년 이맘때쯤이면 단풍과 맑은 하늘의 조화로움에 감탄했을 것이다. 현시대의 후손들도 매년 같은 감정을 반복해서 느낀다.
다만 조상들과 우리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익어가는 붕어빵의 향취를 느끼며 가을이 익어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때는 가을 전어였을 것이다. 후손들은 가난하여 생물 전어는 못 굽고 그와 비슷하게 생긴 밀가루 반죽을 거리에서 구워 먹는다.
가격이 몹시 올라 이천 원에 세 마리인 붕어빵은 이제 비통한 가격이 되어버렸다. 여섯 마리를 사도 나와 아내가 나눠 먹고 나면 집 나간 며느리에게까지 나눠 주기엔 턱없이 부족한 붕어빵 한 봉지.
붕어빵을 담은 봉투를 가슴에 품고 길을 걷는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니 발걸음이 빨라진다. 가슴팍이 뜨뜻하니, 집에서 따뜻한 붕어빵을 집어 들 누군가를 상상하며 흐뭇해진다. 이것이 우리의 늦가을이자 초겨울의 풍경이다.
나의 삶에 앞으로 가을이 몇 번이나 더 있을 것인가? 돌아오지 않을 내 인생의 또 한 번의 가을이 멀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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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자주 곁을 지나쳐간다. 이 순간에도. 지나쳐가는 행복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나는 어느 어린이병원 응급실을 지나치며 아이의 죽음을 가족에게 알리는 부모의 모습과 마주친 적이 있다. 세상을 모두 잃은 그의 목소리를 수화기 너머로 전해 받은 이는 도대체 어떤 말을 해줘야 그를 위로할 수 있을까. 응급실에서 아이를 보냈다는 것은 갑작스러운 사고였을 것이다. 사연 모를 안타까운 한 가정에 대해 깊이 이야기하긴 어려운 일이다.
아이의 웃음소리, 아이가 보채는 칭얼거림. 이 조그만 존재가 신기하게도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아이의 머릿속에서 위대한 프로세스가 일어나고 있음을 상상해 본다.
조그만 존재와 함께 하는 한순간 한순간이 필름을 잃어버린 오래된 사진처럼 소중할 뿐이다. 사랑하는 이가 공기를 나눠 마시며 나의 평생 중 지금 이 순간을 함께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이 기억을 잊고 싶지 않아질 정도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나는 이것이 행복이라고 믿는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행복의 너머에 머리로 알아차리는 행복이 있다. 알아차려야 아는 행복은 그 기원이 사라짐에 있다. 무엇이든 영원하지 않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혹자는 그것이 끝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말한다.1
1니체와 하이데거는 끝을 받아들여야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일대에서도 죽음이 무엇인가를 수업으로 가르치고 이를 책으로도 냈다.
끝이 있기에 나에게 남아 있는 기회가 몇 번이 될지 모른다. 그것은 하늘만 알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순간이 특별해진다. 가격은 비록 비통하지만 붕어빵 향기에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계절이 나의 삶에 몇 번이 남아있는지 알 수가 없다. 당장 이번 가을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일이다. 한 번 한 번의 만남이 소중하다. 오늘 엄마와의 통화가 너무나도 행복하다. 정확히는 엄마와 통화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나는 그 행복을 느끼기 위하여 이 마음을 되짚어본다. 당연히 영원할 것이라고 믿고 싶고 그렇게 착각하게 되는 소중한 존재와의 만남에는 끝이 언제인지 모르는 유통기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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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삶을 배신하는 순간들, 전쟁이나 질병 같은 것들이 삶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일상에는 행복의 기회가 자주 지나쳐간다.
내가 유달리 긍정적이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하느냐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다. 때론 긍정적이고 때론 비관적이며 때론 염세적이다. 매일 일에 지쳐있고 주말이 되면 출근하기 싫다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우는소리를 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그마한 방앗간을 하며 업장 한켠에서는 국산 참기름과 들기름을 짜내 200미리 병당 4만 원에 스마트 스토어에 내다 파는 상상을 한다. 일하기 싫어도 남들처럼 그러려니 하고 일을 할 뿐인 평범한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일에 지쳤음에도) 어떤 순간엔 행복을 느낀다.
행복이라는 게 24시간 한 달 내내 기분이 좋아야만 행복한 게 아닌데 나는 어릴 땐 특별히 큰 사건이 일어나야만 행복한 줄 알았다. 시험에 합격해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하고, 최정상의 아이돌이 되어 내가 부르는 노래를 모두가 따라 부르는 정도의 사람이 되어야 행복한 줄 알았다.
트로피, 상장, 좋은 직장, 명성. 남 보기에 특별한 것에서 행복을 찾으면 80년 살아가는 동안 행복할 일이 그다지 없다. 명성을 가지더라도 잠시일 뿐 역치가 올라버려 행복의 크기는 작아지고 다시 고통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순간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 끝을 인지한다. 그러다 보면 이것이 행복인가 싶은 순간들이 찾아온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순간, 바로 행복이 그대의 손을 잡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