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이유로
고등학생이 되는 사촌 동생만 보면
조언을 하고 싶어 입술이 들썩들썩하는 것은
내가 꼰대나 훈수의 민족이라서가 아니라
내 안의 이기적 밈(meme)이 복제되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밈(meme): 지혜 전파 단위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사용한 단어 '밈(meme)'. '지혜' 또는 '문화'로 통칭할 수 있는 개념들이 개체 간에 전달되는 단위를 말한다. 유전자는 생명 정보를 복제하려 하듯 밈은 뇌에서 뇌로 사회문화를 복제하려 한다.
잔소리가 아니라 지혜 전파 중입니다만?
이기적 유전자가 그렇듯 이기적인 밈들은 자신의 복제를 위해 경쟁한다. 인간은 밈 운반자로서 조언 내지는 잔소리로 전파 행위를 실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고등학생이 되는 사촌동생만 보면 조언을 하고 싶어 입술이 들썩들썩하는 것은 내가 꼰대나 훈수의 민족이라서가 아니라 내 안의 이기적 밈이 그에게 확산되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잔소리한다고 해서 다 꼰대는 아니니까요!
명절, 대국민 지혜 전파 이벤트
명절. 유전자를 나눈 이들이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고 그 현장에서 활발히 지혜가 확산된다. 조카와, 오랜만에 만난 사촌동생과 이야기하는 중에 경험을 이야기하며 지혜를 전하고 콘텐츠를 추천하며 문화를 전파한다.
'엄마 말씀 잘 들어라. 나중에 후회한다.'
'공부 열심히 해라. 나중에 후회한다.'
'지금 많이 놀아라. 나중에 후회한다.'
'임여우이 노래 들으모 후회 안 한대이.'
선택되어야 복제가 일어난다
얘기를 듣는 조카의 입장에서 나의 말이 선택되어야만 그 지혜가 복제된다. 복제는 모방으로 일어나는데, 그러려면 내 말이 보편적으로 퍼진 사회문화이거나 모방하고 싶은 것, 또는 수용자의 무의식중에 모방하게 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내 안의 지혜를 어떻게 해야 선택 받게 하여 복제시킬 수 있을까? 설 명절이라는 큰 기회를 맞아 성공적인 잔소리를 위한 몇 가지 전략을 생각해 봤다.
1. 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설은 나를 홍보하는 날
사람 마음이란 게 누가 "이거 좋은 거니께 한번 잡솨봐~" 하며 먹을 것을 들이대면 일단은 거부감부터 든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도 듣는 사람이 급작스러워 와닿지 않으면 내 말은 허공에 흐트러진다.
설이라는 특수성에 급해질 수 있으나 꼭 이 자리에서 뭔가를 해내야만 한다는 생각을 버린다. 설날은 손님의 재방문을 바라는 영업사원이 되어 오늘의 목표는 조카와 사촌동생의 마음을 여는 것에 초점을 둔다.
2. 구렁이 담 넘어가는 화법
"작용 반작용이 있는 것처럼 공격이 강하면 방어도 강해지는 것 같아. 내 경험상 어른의 목소리가 크고 말투가 강해지면 듣는 나는 거부감이 커졌어."
이 문장에서 나는 현상을 완곡하게 표현했다. 내가 세상의 어떤 정답을 알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강하게 '세상은 어떻다'라고 정의하듯 얘기하는 대신 완곡한 화법을 썼다. 또한 개인적 경험을 얘기하고, 그것이 좋다 나쁘다는 것은 듣는 이의 선택에 맡긴다.
3. 먼저 조언을 바라지 않으면 잔소리는 참는다
설날은 어린 사람들도 각오를 단단히 하기 때문에 그들의 잔소리 방어력이 연중 최고인 날이다. '취업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느냐', '결혼은 언제 할 거냐' 같은 예상 질문에는 이미 답을 다 가지고서 온다. 이런 철옹성을 힘들이지 않고 뚫는 방법은 그들의 문이 열린 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이 내게 먼저 이야기를 걸어오면 2번 전략의 구렁이 담 넘어가는 화법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나의 지혜를 전달한다. 문이 열릴 때를 기다린다.
4. 내가 하는 말의 1%에 승부를 건다
명절이 재밌어야 다음 명절도 기대가 되고, 명절이 아니어도 또 찾게 되는 법이다. 사람이 하는 말 모든 단어가 다 진리를 담고 있어야 하는가? 그렇게 재미없어서 어떻게 사람 마음을 삽니까!
나는 이번 명절에 하는 말 99%는 실 없는 농담이 될 것이라 계획한다. 그리고 3번 전략 같은 절호의 기회가 오면 조언을 가장한 잔소리를 실행한다.
5. 예쁜 말만 하고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인데
좋은 의도여도 그 방법이 잘못되면 듣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명절에 친척은 어린 이들에게 특히 말 조심해야 한다. 관심에 하는 말이 화법이 미숙하면 듣는 사람은 평생 기억에 남을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주지 않게 조심한다.
6.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하여 동생의 문화도 수용
내가 가진 지혜만이 진리라고 생각하여, 나의 지혜는 복제시키고 남의 지혜는 무시하면 말 그대로 꼰대가 된다고 생각한다. 요즘 애들은 아이브를 좋아하는지 뉴진스를 더 좋아하는지 궁금해하고, 동생들이 쓰는 말에서 새로운 유행어가 있는지 유심히 들어보면서 새로운 문화를 수용한다.
음력 12월 30일 설 연휴의 시작. 마음의 준비는 끝났고 전략도 깔끔히 손봤다. 과연 나의 지혜는, 내 마음 속의 밈은 효과적으로 그들에게 복제될 수 있을 것인가.
2023. 1. 21
원문 출처: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채널 "오르다", 동명의 글
참고 자료
동아사이언스 "밈-모방으로부터의 진화"
https://www.dongascience.com/news.php?idx=-54541
위키백과 "밈"
https://ko.wikipedia.org/wiki/%EB%B0%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