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책은 척추로 읽는다.
이문재 시인은 척추로 책을 읽으라 권한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물을 수 있다. 눈도 아니고, 귀도 아니고, 척추로 읽으라니. 척추로 읽으란 의미는 바른 자세, 진지한 자세를 갖고 책을 읽으란 의미이다.
“척추를 곧추 세우고, 다시 말해 온몸과 마음을 집중해 읽은 책이 한두 권 있다면, 당신은 책 속에서 이미 길을 찾았을 것이고, 또 그 길 위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갔을 것입니다. 책을 몇 권 읽었느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척추로 읽는 책이 진짜 책입니다.”
<책, 세상을 탐하다> 성석제, 정호승, 장영희
척추로 읽으라. 어린 시절, 책 읽는 자세가 흐트러질 때면 허리를 곧게 피라는 선생님의 준엄한 말씀이 생각나는 표현이다. 책 읽는 자세의 경건함은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정말로 어떤 책들은 경건하게 봐야 한다. 한 권의 책으로도 평생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성서, 코란, 논어와 같은 인류의 고전들이 바로 척추로 읽을 책이다. 읽는 문장마다 삶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책이다. 천 년을 넘게 견디는 고전은 저마다 그 이유가 있다. 이런 책은 쉽게 볼 수 없다.
고전의 진가는 문장마다 깊이가 있기에 자신의 삶과 계속 겹쳐 읽어야 한다. 그래야 지혜가 샘솟는다. 지혜를 얻기 위해선 책 읽는 자세 또한 경건하고 진지해야 한다. 책을 일종의 신앙여기듯 해야 한다. 이런 자세로 책을 경건하게 읽어 내려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책을 읽는 눈동자를 본적이 있는가.
나는 보았다.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는 배 안에서 세월의 손때가 잔뜩 묻어 너덜너덜 해진 코란을 손에 들고 온 정신을 쏟아 정독하던 어느 할머니의 모습을. 살아생전 수 천 번이고 보았을 코란을 다시금 정독하여 영혼에 되새기는 모습을. 옆에서 본 할머니의 눈은 깊었다. 심원하고 아득했다. 수 없이 텍스트를 씹고 반추하여 뽑은 영양소로 그녀의 생을 살았을 터이다. 말년에 이르러 다시금 보는 읽는 코란의 맛이란 어떨지 가히 짐작할 수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경건하고 진지한 독서가 있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세상에 진지하고 경건한 독서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진지하고 경건한 독서가 근력을 키워주는 웨이트 트레이닝 같다면, 마음을 이완시키고 휴식을 주는 독서도 존재한다. 어떤 것이 격이 높은 독서인가에 대한 높고 낮음은 없다. 둘 모두 독서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 둘을 적절히 써야 진정한 독서 고수이다. 독서를 잘하는 사람은 책에 따라 강약을 잘 조절하며, 힘 주기와 힘 빼기를 능수능란하게 한다. 보디빌더들이 시즌과 비시즌을 구별하며 식단과 훈련 강도를 조절하듯, 독서인도 책에 따라 자세를 달리하면 된다. 故김열규 교수의 글을 보고 독서의 가닥을 잡자.
놀기 반 읽기 반의 독서와 잠언을 섬기듯 하는 독서, 이 두 가지가 그렇다. 그중 어느 하나만 편애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의 것은 느릿느릿 산책하듯 이 글을 읽는다.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인 게 산책이다. 책을 읽을 때에도 그런 기분으로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그래서 꼭 산책하듯 읽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그래야만 잠언을 읽고 외우듯이 글의 가려진 속내가 겨우 잡히기도 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 ‘잠箴’ 즉 침이 바르게 꽂히듯이 말이다. 읽기란 이렇게 절묘한 것이다. 읽기에는 모순과 모순이 둘도 없는 친구가 될 수 있다.
놀기 반 읽기 반의 독서! 듣기만 해도 마음이 편하다. 그러나 놀이가 반이고 읽기가 반이라 해서 업신여길 수 없다. 얕잡아 보거나 깔볼 수도 없다. 그건 그것대로 독서삼매이기 때문이다.
<독서> 김열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