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승준 May 13. 2024

하면 된다.

©Pexels/노인과 청년이 만족한 얼굴로 두 손을 들어 기뻐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자신감 넘치던 나의 좌우명은 “하면 된다!”였다. 잘난 척한다는 비난도 받고 무모한 도전을 한다고 혼나기도 했지만, 그런 기질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다른 애들 다 하는데 너라고 못 할 이유가 있니?"라는 어른들의 말씀은 내게 가장 큰 자극이었고 나 자신도 다른 이들이 할 수 있는 거라면 내가 못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문제집에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나와도 누군가는 풀 수 있는 문제이니 냈을 거라는 생각을 했고 그게 내가 아닐 이유는 없다고 확신했다. 달리기가 조금 느리거나 줄넘기를 많이 넘지 못 해도 반복해서 열심히 하다 보면 남들만큼 잘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생각들은 어린 나를 나아지게 만드는 원천이 되었음에 분명했지만, 어느 어른들의 염려처럼 근거 없는 잘난 척으로 표출되기도 했고 다른 이들에 대한 무시로 작용하기도 했다. 공부를 못 하는 아이들은 머리가 나쁜 아이들이었고 운동을 못 하거나 과제를 해 오지 않는 아이들은 게으른 아이들이었다. 


분명 나 자신도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있지 않았지만 나 스스로는 내가 이뤄낸 몇 가지 성취들로 특별한 사람이었고 대부분의 다른 친구들은 나보다는 뭔가 부족한 아이들이라고 여겼다.


'하면 되는데 왜 하지 않는 걸까?'라고 생각했고 문제집의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로 친구들을 이분했다. 각자의 사정과 다른 매력은 나에게 있어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다.


처음 실명했을 때 내가 나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긴 것은 내가 다른 친구들에게 내리던 주관적이고 냉정한 잣대로 스스로를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난 이제 어려운 문제를 풀기는커녕 그것을 스스로 볼 수도 없었고 운동을 잘하기는커녕 운동장에 혼자 걸어 나갈 수도 없었다. “하면 된다.”도 “할 수 있다.”도 소용없는 게으르고 무능력한 인간이 되어있었다.


다행히 보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들과 하면 되는 것들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머지않아 알게 되었지만 나 스스로 가지고 있던 편협한 자신감은 달라진 나를 한동안 힘들게 만드는 비수로 작용했다. 보이지 않는 난 분명 비슷한 또래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동일한 성취를 이룰 수는 없었지만 내겐 다른 방법들이 존재했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다 이룰 필요도 없었다.


어릴 적 나를 닮은 어떤 비장애 친구는 자신의 잣대로 나의 성취를 평가절하하기도 하고 내가 사는 모양을 안타까워 하기도 했지만 내겐 나를 무시하는 이들의 삶이 부럽거나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괜찮았다. 다른 방법으로 공부하고 또 다른 방법으로 운동하고 다른 모양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내겐 오히려 한 가지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감 넘치는 친구들이 안타까워 보이기도 했다. 


세상엔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자신감으로 잘난 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성취하는 것은 멋진 일임이 분명하지만 자신의 성취가 다른 이를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가 될 수는 없다. 나만 잘났을 리도 없고 세상에 나 아니면 안 되는 일도 없다.


어릴 적 내 생각을 뒤집어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른 이들도 할 수 있다. 다만 나와 같은 시간에 나와 다른 목표를 가지고 다른 노력을 하고 있을 뿐이다. 문제집의 어려운 문제 하나 풀었다고 해서 모든 면에서 다른 친구들보다 우월할 수 없는 것처럼 작은 자격증이나 학벌 혹은 조금 높은 위치가 특별함을 보증하지 않는다. 


“하면 된다.”라는 생각은 여전히 나에게 유효한 가치이지만 꼭 해야 할 필요도 없고 하지 않아도 괜찮다. 다른 이들이 이뤄낸 것은 나도 노력하면 얻어낼 수 있겠지만 내가 이뤄가는 모든 것들도 그렇다. “하면 된다!”는 나에게도 내 친구에게도 동료에게도 후배에게도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적용된다.

작가의 이전글 새 운동화와 친해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