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승준 Aug 19. 2024

주량이 어떻게 되세요?

©Pexels/다양한 술병이 진열되어 있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어김없이 듣게 되는 질문이 있었다.

"주량이 어떻게 되니?"

"두 병이요."

"세 병이요."

당당하게 말하는 동기 녀석들도 있었지만, 음주 경험이 전무했던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주량을 잘 알지 못했다. 쭈뼛거리며 대답을 망설이는 우리에겐 각자의 한계치를 알려주는 주량 테스트가 시작되었고 그 결과는 다음 술자리마다 계급과 서열처럼 따라붙었다.

그 때문인지 우리의 모임에서 어제는 몇 차까지 갔다느니 지난번에는 몇 병을 먹었다느니 하는 무용담은 나이를 꽤 먹을 때까지도 회자되고 이어지곤 했다. "난 아직 취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라든가 "소주는 배불러서 더 이상 못 먹겠다."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며 으스대는 녀석은 어느 술자리에서나 한둘은 있었다.

직장의 어느 회식 날에도 최근의 어느 술자리에서도 "주량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술 많이 먹는 것이 큰 능력이라도 되는 듯 느끼고 남들보다 한 잔이라도 더 마시는 것을 함께 잔 부딪히는 최종 목적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튼튼한 간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모임에서도 큰 탈 없이 오랫동안 술 마시며 즐길 수 있다면 사회생활 하는데 어느 정도 유리한 면이 있긴 하겠지만 우리가 술 먹는 목적이 늘 주량 경쟁은 아니다. 나름 술 좋아하는 나 또한 어깨 으스대며 몇 병을 먹었느니 취하지 않았느니 과장 섞어 으스대며 다니던 때가 있었지만 20년 넘게 마시다 보니 적어도 술자리 본질이 주량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게 되었다.

잘 마시는 사람은 벌컥벌컥 마시면 되고 잘 마시지 못하거나 컨디션 좋지 않은 사람은 천천히 마시거나 조금만 마시면 된다.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한다면 다른 음료 마시면서 분위기만 함께 즐겨도 아무 문제 없다. 다양한 알코올도수의 술이 존재하고 컵의 크기도 음료의 종류도 셀 수 없이 많은 것은 우리에겐 같은 공간에서 여러 가지 다른 속도와 방법으로 즐길 수 있는 선택이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흠뻑 취한 채로 주량의 한계를 느끼는 것은 그중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언제나 모임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낯선 모임에 가면 내 시력 상태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정말 하나도 보이지 않는지… 빛이 보인다면 어느 정도 보이는 것인지… 쉽게 만날 수 없는 앞 못 보는 이에 대한 궁금증 가지는 것이야 자연스러운 호기심일 수 있으므로 불편함 느낄 일도 아니고 쿨하게 대답하고 설명해 주는 편이다.

어떤 이들은 시각장애 있는 내 상황이 시력 좋은 자신의 상황에 빗대어 보면 매우 안타까운가보다. 치료나 기도를 권하기도 하고 필터 거치지 않은 슬픈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의 시력은 술 잘 먹지 못하는 이의 주량처럼 노력한다고 해서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주량을 억지로 늘리는 것보다 몇백 배는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다.

매우 다행스러운 것은 세상 사는 최고의 목적이 건강한 눈으로 앞을 보는 것은 아니라는 데에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미술관의 회화작품을 감상할 수는 없지만 나름의 방법으로 예술을 즐긴다. 버스의 번호를 구분한다거나 차를 운전할 수는 없지만 내게 주어진 다른 감각들로 가야 할 곳을 찾아 이동한다. 눈을 마주치며 상대의 감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목소리의 떨림으로 그녀의 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시력이 좋다면 좀 더 다양한 장소에서 더욱 쉬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과제를 수행할 수는 있겠지만 시력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음료의 종류와 잔의 크기가 다양한 것처럼 내게도 삶을 즐기고 세상을 살아낼 방법이 충분히 존재한다. 소주 한 병쯤 마시지 못해도 사회생활 하는 데에 큰 지장 없는 것처럼 앞 좀 못 본다고 해서 큰 염려해 줄 필요는 없다.

요즘 회식 자리에서 "주량이 얼마나 돼요? 소주 세 병 정도는 드셔야죠."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를 꼰대라고 부른다. 과도하게 내 시각장애 걱정하는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술자리에서라도 술을 권하거나 주량을 묻거나 경쟁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것이 술자리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난 시력 경쟁이나 장애 없는 몸 유지하기를 목표로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오늘도 나는 나의 템포대로 잔을 들고 내 속도대로 지팡이를 들고 움직인다. 난 충분히 잘 살고 있으니 괜한 걱정 거두시길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