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학교에서는 달리기를 많이 했다. 반별로도 달렸고 반에서 가장 빠른 아이들을 추려서 반 대항으로도 달렸다. 운동회에서는 청팀과 백팀으로 나누어 이어달리기했고 언제나 가장 빠른 아이가 박수를 받았다. 달리기를 잘하지 못했던 난 그때마다 작아졌고 부끄러웠고 조금 더 빨라지고 싶었고 빠르지 못한 이유에 대한 각종 변명거리를 찾았다.
체육 아닌 다른 과목 시간에도 '선착순'이라는 제도는 선생님들이 매우 자주 사용하시는 도구였는데 독후감을 쓸 때도 수학 문제를 풀 때에도 신속하게 결과를 만들어 내는 아이들만 칭찬을 받았다. 난 학습 면에서는 환호받는 편에 서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때에도 반대편엔 자신을 낙오자라고 느끼는 아이들이 있었다. 대놓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어른들은 많지 않았지만, 그런 교육을 받아오면서 우리는 빠르게 잘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 번 봐서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여러 번 봐야 하는 것은 공부를 못 하는 것이었고 천천히 일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효율적인 것이 아니었다. 대학입시도 운전면허도 한 번에 성공하는 것은 적어도 두 번 세 번 시도하는 이들에 비해서는 나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첫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 이들은 여러 번의 다음 기회가 있음에도 심각한 좌절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내게도 위 학년 문제지를 푼다거나 남들보다 어린 나이에 이룬 성취들은 특별한 의미로 여겨지곤 했는데 그런 연유들로 나의 학문 탐구는 깊은 의미를 찾는 것보다 빠르게 진도를 나가고 좋은 시험점수를 얻어내는 것에만 집중되었다.
대학에서 만난 동기나 선배 중에는 유난히 재수생 혹은 삼수생이 많았다. 내가 가진 선입견으로 그들은 분명 게으르거나 똑똑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상하게 그렇지는 않았다. 단지 시험 운이 좋지 않았거나 다른 사정이 있어서 시험을 몇 번 더 본 것일 뿐이었다. 우리는 함께 공부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이런저런 경쟁을 하기도 했지만, 시험 한 번만 본 녀석들이 두 번 이상 본 친구들에 비해 유의미하게 우월하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건 나이를 먹어가면 먹어갈수록 우리 각자에게 큰 의미가 되지 못했다.
사범대학 나온 동기들이라 임용고시를 한 번에 붙은 예도 있고 10년 가까이 고생한 친구도 있지만 장원급제라도 한 듯 환호하던 친구나 세상 다 잃은 것처럼 침울했던 녀석이나 10년 넘게 지나서 술 한잔하다 보면 별다를 것도 없다. 운전면허 한 번에 딴 것이 엄청난 성취처럼 이야기하던 이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만 특별한 도로로 다니는 것도 아니고 여러 번 실수했던 시험 도전자들은 가지 못하는 복잡한 도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빨리 가는 것은 그 나름의 장점이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더디 가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결승선을 1등으로 통과한 아이들에게 박수와 상품이 주어질 땐 부러움을 넘어 매번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지만, 우린 이동할 때마다 서로의 속도를 겨루지도 않고 겨룰 필요도 없다. 남들보다 빠르게 가는 것이 효율적일 수는 있겠지만 지나친 효율 경쟁은 낙오자를 양산하는 가운데 제일 빨리 도착한 외톨이를 만들게 될 것이다.
장애를 처음 만났을 때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친구들처럼 학교에 가지 못해서 학년이 올라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중학생이 되고 2학년이 될 때도 난 여전히 초등학교 졸업생이었다. 특수학교에 입학해서 두 살쯤 늦은 나이에 배움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도 대부분의 상황에서 눈 잘 보는 친구들에 비해 빠르게 해낼 수는 없었다.
장애는 내 삶의 대부분을 다른 이들을 부러워하고 내 속도를 부끄러워하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친구들이 대학을 갔지만 난 고등학생이었고 동생들이 취업했지만 난 학생이었다. 비슷한 또래의 누군가가 차를 운전하고 가정을 이루고 어른이 되어갈 때에도 난 멀찌감치 서서 효율적이지 못한 내 처지를 부끄러워했었다. 난 여전히 빠르게 달리지 못하는 낙오자였다.
마흔이 넘고 가정을 꾸리고 사는 요즘 난 예전 생각들을 가끔 하곤 한다. 보이지 않는 내가 지금 어디에 가서 친구들과 달리기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나의 달리는 속도가 그리 빠를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적어도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그 달리기의 최종순위가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내가 수학 문제를 남들보다 빠르게 풀 수 있는 것도 글을 조금 쓸 수 있는 것도 내게 약간의 장점이긴 하지만 이런 것들로 다른 이들을 위축되게 하지도 않고 그들이 크게 부러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특수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효율과는 어울리지 않는 끈기와 인내를 필요로 하는 순간들이 많지만 그렇다고 나의 교육이 특수목적고 다니는 영재아를 가르치는 교사들의 가르침에 비해 가치 없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긴 시간을 살다 보면 순간순간의 효율은 모든 것을 앞설 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갓난아이를 키우는 아빠의 마음으로 하루하루 아들의 체중과 키를 다른 아이들의 수치와 비교하는 것은 굉장한 관심사이지만 지금 아이의 작은 변화가 삶 전체를 가름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빠르고 정확한 것이 때로는 좋을 때도 있지만 모두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많은 이들을 부끄럽고 초조하게 만든다.
시험에 떨어지더라도 대부분의 상황에서 우리에겐 재시도의 기회가 주어진다. 빠르게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도착지에서 우리는 만난다. 당장 남들처럼 할 수는 없더라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 있고 설령 그렇게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긴 시간 후에 그것은 큰 의미가 되지 않는다.
내가 처음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학교는 내년에도 갈 수 있어."라고 말해 주었다면 내 마음은 조금은 편안했을 것 같다. 내가 달리기를 잘하지 못할 때 선생님께서 "꼭 빠른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야. 사람에겐 각자 주어진 속도가 있단다."라고 말씀해 주셨다면 난 덜 부끄러웠을 것이다.
난 남들보다 느리게 사는 삶을 살고 있지만 이젠 다른 이들의 뒷모습을 부러워하느라 내 시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한 번에 되지 않으면 두 번 하면 되고 두 번에 되지 않으면 여러 번 하면 된다. 빠르게 가는 것보다 안전하게 함께 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효율이 인간 최고의 덕목이라면 기계 앞에서 결국 우리는 하찮은 존재가 된다. 말이 조금 느리더라도 성장이 더디더라도 걸음의 속도가 빠르지 않더라도 "그런 것쯤은 괜찮아!"라고 아들에게 말해 주는 어른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