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지성의 힘을 존중하지만, 다수결이 항상 옳다고 믿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을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복잡하게 손익이 얽혀있는 사람들의 관계에서 한 인간의 판단이 모든 이권을 초월해서 완벽하게 정의로울 가능성은 극히 드물다.
다수결이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수의 판단이 대체로 옳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다수의 판단에 의한 결정이 다수의 이익을 보장하므로 인해 공동체의 질서유지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 죄 없는 이를 살리냐 죽이냐의 문제처럼 극단적인 선과 악의 판단이라면 모르겠으나 세상 대부분의 문제는 각자의 위치와 상황에 따라 가치판단의 기준이 자신의 이익과 독립적이기 어렵다. 연금 개혁의 토론도, 최저임금의 결정도, 선거제도의 결정도 결국 다수결에 의해 결정됐지만 그 결정이 절대적으로 옳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현시점에서 그런 판단이 스스로에게 미치는 영향이 반대의 결정보다 낫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수의 판단이 언제나 집단이기주의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수성 가지고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다수의 생각에 반하는 의견을 다수를 상대로 설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반복해서 경험하다 보면 다수결이 가진 집단의 힘이 때때로 소수에게 얼마나 큰 잔인함으로 다가오는지 체험하게 된다.
장애인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님을 설득하는 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실험 영상을 보았다. 여성의 부모는 미리 설정된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남자 친구 역할을 하는 이는 실제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벌어질 사건에 대해 대체로 예측하였다. 부모를 설득해야 하는 역할을 맡은 여성 배우는 현장에서 임기응변으로 부모 역할을 맡은 배우들을 설득하는 것이 과제였는데 그 과제는 장애에 대해 전혀 모르는 그녀에게 너무나 어려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생각한다면 반대하는 부모 역할을 맡은 이들에겐 대사가 주어지지 않아도 할 말이 많았다. 다소 거친 표현이나 비하적인 막말이 섞인다 해도 딸자식 가진 엄마‧아빠로서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이해받을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딸 역할을 맡은 이는 장애를 가진 남자 친구와 결혼 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특별히 잘못된 판단이 아니라는 것을 부모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설득해 내야만 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고 어쩌면 그것은 현실적이기도 했다.
장애 콘텐츠를 다루는 채널이었지만 댓글은 부모의 편을 드는 사람들의 수가 많았다. 딸은 불효녀가 되어있었고, 장애인과 결혼하는 것은 무모한 객기라고 여겨졌다. 장애인과의 결혼을 응원한다는 댓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수의 합의는 작은 의견들의 설득력을 묻어버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장애 채널이 아닌 보통의 채널에서 만들어 낸 콘텐츠였다면 그 결과는 더 큰 격차를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장애인 남편과 사는 것은 어떤 조건과 사랑의 크기도 초월한 잘못된 선택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또한 장애 가진 나의 손익과 관련된 치우친 판단일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에게 동등한 조건에서 그것과 관련한 주제로 토론하거나 논쟁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애 있는 남편은 아무런 장애 없는 이에 비해 일부 신체적 능력이 부족하므로 인해 아내를 불편하게 하거나 힘들게 할 수 있다. 난 볼 수 없기 때문에 운전을 할 수 없고 집에 나타난 벌레를 잡지 못한다. 어떤 이들의 말처럼 아들과 눈을 맞출 수도 없고 아내의 표정을 바로 알아볼 수도 없다. 급한 일이 생겨도 아내를 업고 뛸 수도 없고 종이로 배달된 공문서를 처리할 수도 없다. 나열하자면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훨씬 더 많다. 사람들은 그런 이유를 들어가며 나와 결혼하는 것은 불행과 불편의 연속이고 절대로 틀린 판단이라고 합의한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단점을 나열하려고 노력한다면 난 다른 이가 나보다 못한 부분을 말하라고 해도 그만큼은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나보다 힘이 세지 않고 나만큼 상냥하지도 않다. 그는 시력은 좋지만, 집안일을 하려는 의지도 없고 육아를 거들지도 않는다. 건강하지도 않고, 외모가 훌륭하지도 않고… 그런 식으로 비난을 퍼부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그런 일로 "그와 결혼하는 것보다 장애인과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합의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결혼 상대자를 고르는 본질이 남들보다 얼마나 적은 단점을 가졌는지의 경쟁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아직 결혼생활의 마침표를 찍은 것도 아니고 내 아내가 장애 없는 남자와도 살아 본 것이 아니라 직접 정확한 비교를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의 결혼생활이 다수의 합의처럼 절대적으로 용인되어서는 안 되는 멍청한 결정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의 결혼생활이 혹여 순탄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보이지 않는 내 눈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소수가 다수를 설득해 내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지만 난 삶으로 또 한 번 그들을 설득해야만 한다.
집단지성은 많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수 국회의원의 결정 때문에 숱한 불편함을 이미 겪어 보았고, 다수결 선거로 뽑힌 지도자가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있는지도 알고 있다.
다수의 판단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다수의 근거 없는 합의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소수의 정의를 놓치고 있지 않은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