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세에도 아들을 못 잊어하시는....
오늘 KBS 인간극장엔 97세의 치매 노모를 60대 중반의 아들이 돌보며 겪는 애환을 그려낸 '97세 할머니의 하얀기억' 편이 방송되었다.
치매를 진단받고 별 수없이 요양원에 위탁해온 어머니의 모습을 딱하게 여긴 아들이 1년 먼저 직장을 은퇴하고 다시 시골 고향 집으로 모셔와 단둘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효자 이야기이다.
젊어서는 시누이들의 사성지까지 손수 써 보낼 정도의 학식을 갖추었던 분이었지만 이제는 치매로 사고력이 줄어들어 분별력 없는 어린 애처럼 행동한다. 이런 노모를 아들이 혼자서 얼르고 달래가며 봉양하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따뜻한 온천 물에 온천욕을 시켜 드리려는 아들에게 '나를 삶아 죽이려는 것이냐'고 호통을 치며 요양원에 보내졌던 트라우마로 아들을 불신하고 경계하는 장면에선 나도 괜시리 우리 엄마 생각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느새 94세의 연세가 되신 우리 엄마.
젊어서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셨음인지 허리가 많이 굽어 이마가 땅에 닿을 듯이 걸어 다니시는 모습은 자식들을 슬프게 한다.
몸에 살이 붙지 않아 발목이 우리 손목보다도 더 얇게 야위었고, 그렇게 자랑하시던 청력도 약해지시어 이제는 전화로 소통하기도 어려울 만큼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저 연세에 이만하면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점점 더 쇠약해지신 모습엔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다.
엄마는 우리집 대가족의 종부로 살으셨다. 시부모, 시동생, 시누이, 우리 남매들까지 14명의 식구들을 챙기며 살으셨으니 고생이 가히 짐작이 간다.
그 옛날 어린 시절 새벽에 소변이 마려워 잠에서 깨어보면 한겨울 깜깜한 꼭두새벽인데도 우리 엄마는 수북이 쌓인 눈속을 헤치고 대문 옆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고 부엌으로 나르고 계셨다. 그 많은 식솔들의 아침을 지으려면 얼마나 많은 물이 필요했을까.
그뿐이 아니다. 물을 더 길어다 뎁혀서 식구들의 아침 세수에 춥지 않도록 세수대야에 온수 한바가지씩을 부어 주시는 일까지 도맡아 하셨으니 어찌보면 그때의 일이 추억으로만 남아 있지만 이제 나이들어 생각해보니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겨울 추운 새벽에 하루이틀도 아니고 매일이었을 엄마의 일상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고 생각만으로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또한 변변치 못한 옛날 시골집의 불편한 부엌에서 커다란 가마솥에 쌀을 부어 밥을 안치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아침을 지으셨다. 아침밥 14그릇에 출근하시는 아버지와 올망졸망한 시동생과 시누이를 비롯한 우리 남매들의 학교 도시락, 그리고 산에 나무하러 나가는 머슴 도시락까지 10개를 더 준비하려면 도합 24그릇의 밥을 퍼 담으셔야 했다. 식사 때마다 가마솥을 열고, 부뚜막에 한 발을 걸쳐 올리시고 계속해서 밥을 푸셔야 했으니 오죽하면 어린 막내 고모는 올케언니인 우리 엄마를 '밥차리는 언니'라고 부를만큼 거대한 식구들의 식사준비를 끼니마다 해내신 것이다. 게다가 그 많은 도시락 반찬까지 매일 만들어 대야 했으니 옛날 살림에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처럼 잔치 상차림만한 규모의 대식구들의 끼니를 매끼 전쟁치르듯 해내고 살으셨다.
그뿐 아니라 농사철이면 놉들의 점심, 저녁까지 해주어야 했고, 식사 중간이면 새참까지 만들어 내야 했다. 그 많은 식구들의 빨래며 밤이면 보이지도 않는 호롱불 어둠 속에서 식구들의 해진 옷, 양말들을 기워대는 바느질까지, 또한 계절에 따라 누에치기, 베짜기며 밭농사는 물론이고 종부로서 연로하신 시부모 봉양까지 하셔야 했으니 실로 철녀(鐵女)의 삶을 살으신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엄마가 앓고 누워계신 적을 한번도 본 기억이 없다. 아마 아프실 시간이 없으셨을 것이다. 나를 낳고는 바로 다음 날 일어나 추수하는 일꾼들 밥을 준비하셨다든지, 동생 누구를 낳기 전에는 부엌에서 일하다 산통을 느껴 곧장 방으로 들어가 출산하셨다는 등 산후조리는 아예 꿈도 꾸지 못하고 살으셨던 삶의 애환을 남의 이야기 말씀하시듯 풀어 놓곤 하셨다. 물론 그 시대엔 뭇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던 어려운 시기였기는 하지만 그냥 가볍게 치부하기엔 너무도 험난한 女路를 걸어 오신 우리 엄마가 애틋하기 이를 데 없다.
나는 아버지께서 작고하시고 나서부터 바로 시골로 들어가 홀로 계시는 엄마와 십수년을 함께 살아왔다. 나는 시골집 가까이에 있는 직장을 편하게 출퇴근할 수 있었고, 엄마는 외롭지 않고 아들 사랑에 푹 빠져 살으셨다.
식사 때면 맛있는반찬이 있어 엄마를 드시게 하려고 좀 절제를 하면 금방 눈치를 채시고 불호령이 떨어진다. 왜 너는 안먹고 나만 먹게 하느냐며 안드시겠다고 협박을 하신다. 따라서 어느 때는 내 입맛에 안맞는 반찬도 엄마가 드시도록 하려면 눈치를 보아가며 내가 먼저 먹어야만 했다. 엄마는 늘 아들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밥을 짓기 전에 남은 식은 밥이 있어 먹어 치우기 위해 내가 먹고 엄마에게는 따뜻한 밥을 퍼드렸다. 엄마가 그걸 알으시고는 식은 밥을 달라 하셨다. 나는 괜찮다며 기어이 식은 밥을 내가 먹고 말았다. 그런데 엄마는 아들이 식은 밥을 먹게 한 것이 그리도 크게 서운하셨나 보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그리고 그 다음 날까지도 그 일을 거론하시고는 궁시렁대시며 화를 참지 못하시는 것이다. 나는 매우 마음 아파 하시는 엄마를 보며, 아들이 식은 밥을 먹게 하는 것이 당신에겐 그토록 참을 수 없는 고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 어느 날엔가는 똑같이 식은 밥이 남았기에 이번에는 내심 모르는 체 그 식은 밥을 엄마 앞에 드리고,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을 펐다. 짐짓 알면서 엄마가 왜 식은 밥을 드시느냐고 물었다. 엄마는 맛이 있으시단다. 엄마는 식은 밥에는 괘념치 않고 아들이 따뜻한 밥을 먹게 된 것이 그리도 좋으신지 행복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 이후로 나는 이런 경우가 생기면 어김없이 엄마 앞에서 따뜻한 밥만 먹어야 했다.
엄마는 평소에 내가 출근하고 나면 낮에는 줄곧 TV를 보시다가도 내가 퇴근한 순간부터는 TV와 반대로 돌아 누워 계시며 절대 TV를 보지 않으신다. 아들이 TV 보는것을 방해하지 않으시려는 것이다. 밤에 잠을 못 이루시고 뒤척이시기에 TV라도 보시라 권해드렸더니 TV가 재미 없다며 싫으시다고 거짓말을 하신다. 실은 TV를 보겠다고 옆에서 자는 자식의 잠을 깨우거나 방해하고 싶지 않으신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엄마는 이토록 아들에 대한 헌신적 사랑이 당신의 삶에 우선하여 몸에 배인 것이다.
화장실에 화장지가 떨어질 즈음이면 어김없이 미리 여분의 화장지를 변기 옆에 꼭 챙겨 놓으신다. 아들이 화장지가 없어 난감해하는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어쩌다 화장지 챙기는 일을 잊으신 날에는 큰 잘못을 저지르신 양 자책하시며 땅이 꺼지게 후회하신다. 아들이 불편해 하는 모습을 못 참으시는 것이다. 이처럼 작은 일에도 끊이지 않는 엄마의 지극한 사랑에 울컥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많은 엄마의 사랑은 다 읊어낼 수 없을 만큼 끝이 없다.
그런데 요즈음 엄마가 많이 쇠약해지셨다. 지인들의 나이며, 생일까지 죄다 외워대고, 동네 집집마다 제삿날까지 다 기억하시던 전설처럼 총명하시기로 소문난 기억력도 점점 희미해져 가고, 화장실 가시는 걸음걸이 마저 위태롭다.
동네 경로당 출입조차 않으실 정도로 집 밖에는 나서지 않고 단아한 모습으로 집만 지키며 평생을 살아 오신 우리 엄마가 요즈음에는 변하셨다.
집을 떠나 도회지의 아들 집에 가시자고 하면 무작정 안가시겠다고 손사레를 치며 싫어 하시던 우리 엄마가 지금은 옷 보따리를 싸서 미리 챙겨두고 따라 가실 날을 기다리신다. 그리고는 시골 집에서 당신 홀로 계시다가 아무도 몰래 죽어 있으면 되겠느냐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연로하신 당신을 인지하시고 죽음을 대비하시려는 것일 게다. 아들 옆에서 돌아가시는 것이면 마음이 놓이시나 보다.
얼마 전엔 서울에 사는 딸이 새 집을 장만하고는 돌아가시기 전에 잠깐이라도 같이 지내고 싶어 모셔갔는데 계시기 싫다고 집에 보내달라며 마음에도 없는 억지 소리를 하시고 딸 가슴에 못을 박고 내려 오셨다. 딸은 그러시는 엄마가 무척 서운했겠지만 이 또한 죽음을 대비하시는 늙으신 엄마의 지혜일 터이다.
그토록 강단이 있게 세상을 헤쳐나며 살아오시던 우리 엄마가 이제는 나약한 모습으로 변하시는 모습에 억장이 무너진다.
지금은 아무 것도 하지말고 가만 계시라는 당부에도 잠시 헛눈을 파는 사이에 엄마는 못 가누는 몸을 이끌고 주방으로 가시어 밥을 챙기려 달려 드신다. 뭐하러 나오셨느냐며 만류하는 아들에게 엄마는 기어 들어가는 작은 소리로 말씀하신다.
"네게 밥을 챙기게 해서 미안하다. 고맙다."
자식에게 뭐가 그리 미안하고 얼마나 대접을 받으셔서 고마운 것인지 모르겠다. 언제까지 다해야 자식 사랑이 끝나는 것인지 엄마의 끝없는 사랑은 계속되고, 그 은혜를 다 알아내지 못하는 자식은 불효스러운 마음에 복받쳐 오르는 감정으로 뜨거운 눈물만 흘린다.
아직도 세탁기에서 걷어내온 빨랫감에서 당신의 속옷은 직접 챙기시며 아들 손에 잡히게 하고 싶지 않아 하시며, 요실을 방지하기 위해 착용하시는 기저귀도 똘똘 말아 아들 눈에 띄지 않게 몰래 처리하시려고 애를 쓰시며 자식에게 조금도 누가 되고 싶어 하지 않으시려는 엄마의 속깊은 행동은 이를 지켜보는 자식들의 마음을 한없이 아리게 한다.
그러다가도 간혹 직전의 일도 기억 못하시고 엉뚱한 소리를 하시는가 하면 평소의 엄마답지 않게 억지 소리를 하시며 자식들을 당황스럽게 하신다. 그래도 이만큼만 유지하시며 살으셨으면 좋겠다. 더는 기억의 끈을 놓지 않으시고 뜻하신대로 좋은 모습을 간직하시며 후회없이 사시다가 어느날 자식들과 살갑게 따뜻한 눈맞춤을 하면서 조용히 눈을 감으셨으면 좋겠다. 이는 엄마의 제일 큰 소망이며, 자식들의 최고의 바람일 터이다.
엄마를 돌보느라 잠시도 엄마 곁을 비울 수 없어 외출 한번 맘 편히 하지 못하고 애쓰시는 우리 형님.
엄마 사랑은 막내 사랑이 분명하여 늘 엄마가 잊지 못하시고, 반사적으로 엄마에게 최고의 효자 노릇을 하는 내 동생.
부족하지만 가까이에서 오랜동안 엄마와 함께 살아온 둘째 아들인 나.
그리고 멀리서 애틋한 사랑을 보이며 노심초사 엄마 걱정을 끊이지 않는 한양에 사는 두 딸들까지 우리 엄마에겐 보물같은 존재들이다.
이제 이 다섯남매들이 나이들어 모두 은퇴하는 시간까지 건강을 유지하며 자식들의 삶을 지휘하시고 올곧은 정신으로 버텨오신 우리 가족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신 우리 엄마.
건강하시게 행복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