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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녀미 Sep 06. 2021

이토록 작고 소중한 주방

처음에는 충분히 넓다고 생각했는데.

조리공간이 충분하고 그릇장도 놓을 수 있는 큰 주방을 갖고 싶다 이야기하고 실제로도 큰 주방을 갖게 되는 날에는 너무 설레어서 자다가도 한 번씩 깨서 주방을 배회할 것 같기는 하지만, 지금 이 작고 낡은 주방에서도 가끔 나는 내 주방이 너무 좋아서, 너무 소중해서 가끔 울컥하게 된다. 


늦은 밤 주방 마감을 하고 깨끗하게 치워진, 하지만 잡다한 것들이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는 이 알찬 주방을 보면 가끔 이상하게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낀다. 

아기 고양이 수유를 하기 위해 일어난 어떤 새벽에 보게 되는 어둡고 고요한 내 주방도 그렇다.

수시로 주방 일을 하게 되는 오후에는 주로 많은 것들이 복작복작 어수선하게 늘어서 있지만 자기 전에는 조금이라도 정리해두고 방에 들어가는 편이라 새벽에 내 주방을 마주할 때면 잠시나마 고요하게 쉬고 있는 내 주방이 조금 더 반갑다. 


처음에는 넉넉하다 생각했던 수납공간이 부족하다 못해 미어터질 지경이라 모든 찬장에 그릇 선반을 넣어 두 개의 층으로 나눠 사용하고, 수납장 아래 애매한 구석에도 간이 선반을 어떻게든 설치해 활용도가 높은 공간을 만들었다. 

인스타에서 가끔 보는 깔끔한 주방의 텅 빈 카운터, 모든 것들이 서랍과 찬장에 쏙쏙 들어가 있는 모습은 깔끔하고 마음도 차분해지지만 주방에서 꼼지락대길 좋아하는 내 살림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어서 나는 자주 쓰는 것들은 서랍을 열지 않고, 수납장 문을 열지 않고도 손에 닿는 곳에 걸어두는 편이다. 

그래서 나의 주방에는 꽤 자주 망치와, 전동드릴, 랜치 같은 것들이 등장한다. 소소하게 버리지 않고 모아둔 (심지어는 많이 낡은 가구를 버릴 때에 일일이 분해해 둔 나사와 너트 같은 것들) 온갖 것들, 그리고 집에서 애매한 장소에, 애매한 정도로만 쓰임이 있는 것들을 이용해 주방의 죽은 공간을 살려낼 때. 진짜 이 맛에 살림을 한다며, 너무나 뿌듯해서 주방을 깨끗하게 치우고도 끊임없이 주방을 서성이기도 하는 그런 날들이 있다. 


언젠가 이 집에서 나가는 날, 내가 살았던 그 어느 집 보다도 내 손길이 많이 닿은 이 집에서 내 손으로 걸고 달았던 것들을 떼어내고 내 손으로 뚫은 구멍을 메우고, 벽에 붙은 많은 사진들을 떼어내고, 소중한 내 살림들이 빠져나간 텅 빈 공간을 바라보게 되는 상상을 한다. 

나와 남편이 결혼을 하고 신혼시절을 보낸 집. 보리와 나의 첫 미국 생활을 함께한 집. 구름이를 만난 집.

온갖 주워온 가구들을 고치고 다듬어 채우고, 매주 대여섯 개의 마트 전단지를 보며 알뜰살뜰 돈을 아껴서 냄비와 그릇을 사고 냉장고를 바꾼 우리 집. 


운이 좋아서 크고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고 해도 언젠가 이 집이 많이 그리울 걸 알아서, 나는 오늘도 괜히 주방을 서성이며 이곳저곳을 닦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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