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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녀미 Dec 14. 2020

쌀국수 받고, 김밥 보내다

'情'이 오가는 Palms 생활

걸어서 10분 거리인 그녀와 우리 집 사이를 수많은 접시와 종이봉투, 보관용기들이 오간다. 

집에서 끓인 진한 육수와 함께 바로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쌀국수 재료가 오고, 김치찜이나 닭볶음탕이 가고, 에그누들에 중국식 갓 피클이 오고, 양파장아찌에 빈대떡이 간다. 진하고 묵직한 초콜릿 케이크가 오고, 치아바타에 스콘이 간다. 그녀는 코스트코에서 산 양 많은 식재료를 우리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나는 이따금씩 육아로 정신없는 그녀를 위한 간식거리나 끼니를 때울 것들을 갖다 주기도 한다. 


한국에 살 때에도 이런 이웃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 서울에 살 때 옆집 이모들과 엄마의 사이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이후, 의정부 아파트에 살 때는 옆집에 사는 사람들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리산에 살 때에는 우리 집에 너무 외딴곳에 있어서 이웃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고, 일산으로 이사를 해서는 같은 건물에 사는 후배 가족과 가깝긴 했지만 과일을 사면 좀 갖다 주거나 밖에서 함께 밥을 먹거나 했지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문을 두드리는, 그런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각종 매체에서 등장하는 그런 장면은 나에게는 조금 만화 같은 설정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남편을 따라온 이 곳. 가족이나 친척, 친구 하나 없는 이 곳에서 그런 이웃이 생겼다. 남편의 전 직장(?) 동료인 헤나는 요리를 잘하고, 좋아하기까지 해서 수빈이가 일하는 곳에도 자주 자신이 구운 과자 등 직접 만든 음식들을 가져오곤 했다. 남편과 친해진 뒤에는 남편에게 집에 가져가서 먹으라며 그녀의 엄마가 해 준 쇠고기 쌀국수 재료를 싸서 줬었는데 얼마나 꼼꼼하게도 싸 줬는지 고기와 뼈가 가득 든 진한 육수와 면, 토렴 해서 익혀 먹을 얇은 쇠고기, 피시볼, 채 썬 양파와 파, 숙주, 타이 바질, 라임 두 조각과 찍어 먹을 스리라차 소스와 호이신 소스까지 들어 있었다. 그 날 나와 남편은 쌀국수의 신세계를 맛봤다. 그전까지 쌀국수라고는 흔한 외식 메뉴, 향신료와 조미료 맛이 강한 국물 속에 맹맹한 면이 담긴 음식 정도였는데 그 날의 쌀국수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던 쌀국수는 진짜 쌀국수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런 그녀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우리는 그 집에 신세를 많이도 졌다. 남편이 '헤나가 이거 줬어' 하며 쿠키, 케이크, 음식들을 들고 퇴근하는 일이 종종 있었고, 우리 차 포포가 고장 나서 고치러 갔던 날 남편의 퇴근을 도와주기도 했다. 공항까지 라이드를 해 준 적도 있었고 나에게 폭신폭신한 쉬폰 케이크 시트를 굽는 방법을 알려준 것도 그녀이다. 요리를 워낙 잘하는 그녀이기에 난 가끔 넉넉히 한 한국 음식을 남편 손에 들려 보냈을 뿐, 선뜻 무언가를 해 보내기가 어려웠고 그마저도 음식을 보내고 난 뒤에는 그녀가 음식을 맘에 들어했는지, 먹고 어떤 후기를 들려줬는지 살짝 긴장한 채로 남편에게 묻곤 했다. 


그러던 중 지난 6월, 그녀가 아기를 낳았고 하필 겹쳐버린 코로나 덕분에 그녀의 엄마가 산후조리를 돕지도 못하게 되자 우리는 코스트코에 장을 보러 갈 때 그 집의 장도 함께 봐주는 일이 잦아졌다. 온갖 것들을 살뜰하게 해 먹던 그녀의 장바구니 목록에 반조리, 냉동식품들의 비중이 늘어나는 것이 속상했던 우리는 저렴한 식재료(이를테면 닭고기)를 이용한 음식을 넉넉히 해서 그녀의 집 앞까지 갖다 주었다. 한 번은 김밥을 서너 줄 싸서 갖다 주었는데 그녀의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어찌나 동동 뜨던지. 이렇게 소소한 것들을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어 너무 기쁘다 생각하며 그 길을 걸었다. 

아, 문득 떠오르는 웃긴 일화 하나. 그녀의 코스트코 장바구니 목록에 달달한 페이스트리가 있고 '난 설탕이 필요해'라고 덧붙여져 있었는데 남편은 '헤나가 설탕이 필요하대' 하고는 10파운드짜리 큰 설탕 한 팩을 사다 주었다. 알고 보니 그 설탕이 그 설탕이 아니더라는... 우리말로 하면 '달다구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마침 베이킹이 하고 싶던 나는 초콜릿 쿠키, 스콘, 모카번, 티라미수, 치아바타를 만들어 갖다 주었고 그녀에게 큰 에너지(!)가 되었다고 들었다. 


언젠가 이 지겨운 코로나가 끝나고, 그녀의 딸 이비가 조금 크면 내가 좋은 '동네 이모'가 되어 줄 수도 있을 텐데. 그녀나 내가 이사를 가기 전까지 이 동네에서 그런 '이웃 살이'를 많이 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그녀의 집으로 간 '손'순두부 찌개와 반찬 
남편의 생일, 그녀가 만들어 준 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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