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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녀미 Jan 10. 2022

내가 살던 지리산 도깨비집

인간극장에 나왔어도 레전드 편이 되었을 것

서울에서 열 살, 3학년 1학기 까지를 보내고, 그 후로 딱 1년을 의정부에 살다가 4학년 여름 방학을 지리산 삼촌 집에서 세 명의 사촌들과 보낸 이후로 나는 '서울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전에도 두어 번, 아마 2학년과 3학년도 여름방학의 일부를 지리산에서 보내긴 했었지만 개학을 하면 다시 서울 학교로 돌아가곤 했었는데 4학년 때는 거의 한 달이나 되는 여름 방학 전부를 지리산에서 보내고도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나 그냥 여기서 학교 다니면 안 돼?' 하고 물었다고 한다. 나에겐 그 무렵의 느낌 같은 것들만 남아있지 구체적인 장면이나 순간은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다. 

여하튼 나는 그렇게 내 어린 시절 기억의 전부이자, 내 고향 아닌 고향인 지리산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내가 다니게 된 초등학교는 집에서 차로 25분쯤 걸리는 거리라 스쿨버스, 그 당시 우리가 쓰던 말로는 '학교차' 두 대가 중산리와 내대리 각각 한 곳씩 코스를 정해 등하교를 도왔다. 병설 유치원 애기들까지 포함한 전교생이 60명 정도였고 학교 근처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열 명 정도는 되었으니 50명 정도가 학교차를 이용해 등하교를 했는데 그중 내가 사는 내대 마을 학생이 좀 더 많아서 일반 스쿨버스인 45인승 정도의 학교차가 내대차, 노란 스쿨버스이긴 하지만 마을버스 정도 크기의 작은 학교차가 중산리차 라고 불렸다. 기사님들의 성함은 모르지만 생김새와 목소리는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만 같다. 


학교차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학교 생활의 아주 큰 비중을 차지했다. 내대마을의 가장 윗 쪽에 사는 남매가 가장 먼저 빈 학교차에 오르고, 나와 함께 사는 친척 두 명을 포함한 서너 명이 그다음 차례였다. 학교 차에는 새 학년이 될 때마다 각자의 자리가 정해져 이름표가 붙었기 때문에 나는 버스에 오르면 내 자리에 앉아 가방을 무릎 위에 올리고 가장 친한 친구, 하라와 희진이가 타기만을 기다렸다. 특히 더 친했던 친구 하라와는 매일 보는 사이인데도 어찌나 할 이야기가 많았는지 아침마다 당시 인기 있던 잡지 [와와 109]에서 오려낸 편지지에 쓴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고, 앞이나 뒷자리의 누가 들을세라 귓속말도 많이 했던 것 같다. 자리에 제대로 앉지 않는 유치원 동생들을 혼내기도 하고 또 우리가 기사님께 혼나기도 하면서 봄의 벚꽃, 여름의 푸른 잎, 가을의 단풍, 겨울의 앙상한 가지 아래 도로를 따라 학교와 집을 오갔다. 


하지만 6학년 2학기가 되기 전까지의 2년 동안은 학교차를 타러 가는 길도 쉽지가 않았다. 학교차가 오는 곳은 나름 큰 길(?)인 장우네 집 앞 까지였고 그 이후 먼지가 풀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1킬로미터 넘게 올라가야 우리 집이 나왔다. 아침에 학교에 갈 때는 대부분 삼촌이 차로 데려다주셨고 (낡은 포터 트럭의 짐칸에 타고 선 채로 비포장 도로를 달리면 꽤 신이 난다. 한겨울만 빼고.) 만약 그렇지 못한 날에도 열심히 달리면 15분 정도 만에 큰길까지 내려갈 수 있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하굣길은 달랐다. 봄가을은 몰라도 여름에는 6교시를 마치고 집에 가는 3시 30분 무렵에도 햇빛이 뜨거웠는데 그늘 한 점 없는 그 길을 여름날 오르자면 한숨부터 나왔다. 가끔 운이 좋으면 그곳을 지나는 공사 차량을 얻어 타기도 했는데 운동신경이 유난히도 없던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덤프트럭에 올라타지도 못해서 아저씨들이 내려서 나를 들어 차에 태워주었던 적도 많다. 나는 만난 적 없지만 멧돼지가 종종 출몰하는 길이기도 해서 멧돼지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한동안 우산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 스펀지라는 티비 프로그램에서 야생동물이 나타났을 때 자동 우산을 펼치면 놀라 도망간다는 내용을 방송 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멧돼지가 나오는 비포장 도로의 중간 어디쯤 (사실 터널이 개통되기 전까지는 그 끝에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 집은 어마어마하게 외진 곳에 있는 아주아주 이상한 시골집이었다. 

집이 지어진 부지는 세 구역으로 나뉘어 계단 식으로 높이가 달랐는데 그중 우리는 2층이라고 불리는 구역의 길다란 집에서 지냈다. 1층에는 '식당' 이라고 부르던 갈색 건물과 수영장이 있었고 2층에는 우리가 지내던 건물과 별채처럼 쓰던 다른 건물이, 3층에는 아주 작은 두 개의 독채가 있었다. 3층에 있는 두 개의 독채는 지붕이 도깨비집처럼 울퉁불퉁해서 귀여운 모양이었는데 길에서 우리 집을 내려다보면 이 지붕들만 덩그러니 보이기 때문에 나는 나중에 이 집을 도깨비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신기한 구조의 집은 애초에 지어진 목적이 그 근처에 무려 3-4년간 이어진 큰 공사인 삼신봉 터널 공사를 위한 인부들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그렇게 식당 건물, 화장실 건물, 여러 개의 방, 독채 등등이 존재하는 형태였으며, 식당 건물에는 그야말로 식당용 식기인 스테인리스 밥그릇과 면기, 플라스틱 국그릇과 찬기, 인삼이 그려진 수저들이 아주 많이 있었다. 내가 4학년 2학기를 마칠 무렵에는 엄마 아빠와 동생도 지리산으로 내려오고야 말았는데 그때 함께 왔던 코렐 그릇들 마저 모두 깨지자 우리는 모든 걸 포기하고 그 식당용 그릇을 메인으로 사용했다. 


우리 집 여러 개의 건물 중 2층의 길다란 건물에는 킥보드를 타고 달릴 수 있는 (실제로 어른들이 안 계실 때는 타고 달리기도 했던) 긴 복도가 있고, 그 양 옆으로 10개 정도의 방이 있었다. 아궁이(...)에서 가장 가까운 안방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방을 훑어보자면 안방 옆으로 식당 방, 엄마 아빠방(우리 방)이 있었고, 중간 현관을 지나 할머니방, 노래방이 있었다. 반대편으로는 옷방, 하숙 비슷한 것을 했던 명식이 삼촌 방, 책방, 정체모를 창고방, 언니 방(으로 기억되는...?) 방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정말 기가 막히는 구조이다. 집에 노래방이라니............. 


그 시절의 집에 대해서만 해도 쓸 말이 이렇게 많고 사실 이건 내가 기억해두고 싶은 내용의 100분의 1쯤 될까 말까 한 일부에 지나지 않는데, 내가 다닌 학교에 대해서도 쓸 말이 그보다 더 많다. 2학기만 다니긴 했지만 나에게 강렬한 한 학기를 선물해 주신 4학년 박동균 선생님, 5학년 담임이셨던 인자하시고 귀여우신 최순옥 선생님, 매년 6학년 담임을 맡는 걸로 학교 명물이셔서 모든 기수가 6학년이 되길 기대하게 만드셨던 김호연 선생님까지. 그건 또 다른 어느 날 밤, 잠이 안 온다면 풀어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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