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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녀미 Nov 11. 2020

지리산골 도깨비집의 겨울

코끝은 시리고, 바닥에선 리모컨이 녹던 엉터리 구들장이 놓인 집

 지리산의 겨울은 참 길었다. 추수가 끝날 무렵부터 마을 곳곳에 불 피운 연기와 냄새가 흩날리고 가을에 수확한 깨나 콩 등을 말리고 털어낸 가지 더미들이 길 곳곳에 있었다. 기름을 짜고 난 깻묵과 낙엽 등을 섞어 두엄을 만들었고, 군불을 때는 집에선 장작 준비로 분주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우리 집은 그런 것 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날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겨울은 조금은 위압적이면서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포근함이 있었다.


 서쪽이 산으로 막힌 우리 집은 오후 세시면 해가 졌다. 가뜩이나 높은 해발 덕분에 아랫마을이나 덕산과는 2~3도 가까이 기온 차가 났는데 해가 지고 나면 그나마 햇빛을 받아 두었던 마당의 파쇄석들이 빠르게 식었다. 눈이 많은 동네는 아니었지만 어쩌다 눈이라도 내리는 날에는 큰길가에 차를 두고 올라오지 않으면 마을로 나갈 수가 없었다. 큰길에서 집으로 올라오는 길은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었지만 워낙 경사가 심한 곡선인 데다 길 옆은 난간도 없이 계곡으로 이어져 있어 자칫하면 차와 함께 계곡 아래로 떨어지기 십상이었다. 눈이 온다고 해서 부지런히 눈을 치우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우리 집은 그랬다. 


 눈이 온 다음 날은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놀았다. 눈 위에는 알 수 없는 흔적들이 많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작은 눈 부스러기가 바람에 날려 굴러가며 낸 자국이었지만 가끔은 작은 새나 다리가 짧은 동물 같은 것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이 있기도 했다. 초코집은 기름으로 난방을 했는데 한 번 주유소 차가 올라와서 우리 집 뒤 탱크에 기름을 채우면 40만 원이 훌쩍 넘었다. 한 달에 주유소 차가 두 번이나 오는 때도 있었으니 겨울 난방비로만 200만 원이 한참 넘게 드는 셈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척이나 큰돈이다. 지리산에서의 겨울은 녹록지가 않았다. 물이 얼어 계곡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차로 물을 길어와서 쓰는 일도 자주 있었다. 물이 얼어서 그러기도 했지만 겨울에 가뭄이 오면 우리 집 옆 작은 계곡이 말라버리는 일이 종종 있어서 더 그랬다. 거실 창이 하도 커서 겨울엔 투명한 비닐 문풍지를 창마다 붙여야 했는데 그래도 창 가까이에선 항상 냉기가 넘쳤다. 자잘하게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은 일상은 불안했지만 묘하게 안온한 느낌을 풍겼다. 아주 작은 따뜻함마저 소중하고 간절해지던 날들이었다.


 초코집에 살기 전, 이른바 '도깨비 집'에 살던 초등학생 시절의 겨울은 더 만만치 않았다. 도깨비 집에서는 아궁이에 불을 피워 안방을 데웠다. 삼촌이 우리 집 아궁이 담당이셨는데, 멀리 나갔다 돌아오는 날에는 옷도 채 갈아입지 못하고 아궁이 앞 계단에 앉으셨다. 얼른 불을 피우지 않으면 온 가족이 하얗게 입김이 나도록 추운 방에서 오들오들 떨어야 하는 상황에서 매일같이 불을 피워야 했던 삼촌이 느꼈을 고단함에 대해 문득 생각하게 된다. 


 그나마 안방은 불을 피우면 이불 아래 바닥은 리모컨이 녹도록 절절 끓었다. 비록 공기는 쉽게 데워지지 않아서 아주 추운 날엔 자다 보면 등은 빨갛게 익어도 코가 시리긴 했지만. 나중에 알았지만 구들장을 잘 못 놓으면 그렇게 된다고 했다. 잘 놓인 구들장은 불을 피우면 은은한 온기가 하루를 넘게 간다고 했다. 잘 놓인 구들장이 무쇠솥과 같다면 우리 집 구들장은 양은냄비였던 셈이다. 


 무엇보다도 부엌은 정말로 추웠는데 선풍기처럼 생긴 난로 앞에 앉아 있어도 따뜻하기보단 피부가 뜨겁기만 했다. 식당에서 쓰는 것 같은(실제로 잠시 식당을 할 때 썼던) 스테인리스 식기에 밥을 먹었는데 그때는 할머니가 해주시는 비지찌개 맛이 밍밍하고 질감 또한 질퍽한 게 하나도 맛이 없어서 잘 먹지 않았고 냉동 떡갈비나 용가리 치킨은 밥 아래에 숨겨가며 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만약 우리 지인 중 누군가가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인간극장에 제보했더라면 분명 방송에 나오고야 말았을 상황에서도 우리들은 신기하게 큰 불편함이나 결핍을 느끼지 않고 자랐다. 기껏해야 용가리 치킨 수가 적은 것, 어린이 1인 당 컴퓨터 사용 시간이 30분으로 제한된 것 정도가 불평 거리였다. 


 봄에는 쑥이나 냉이를 캐거나 몰래 논에 들어가 모를 뽑아 던지며 놀았고, 여름엔 종일 물에 들락날락 거리며 놀았고, 가을엔 산속을 돌아다니며 밤과 도토리를 주우며 놀았다. 대봉감이 많이 나는 동네라 감도 따고, 마을에서 곶감 일손이 부족하다고 하면 용돈벌이 삼아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감을 깎고, 실이나 플라스틱 곶감 걸이에 매달았다. 감나무 가지가 앙상해지고 거기에 걸린 감이 빨갛게 익어 홍시가 되기를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겨울이었다. 하늘은 물감처럼 파랗고, 감은 새빨갛고, 새하얀 입김이 폴폴 났다. 


 겨울엔 마땅히 놀 거리가 없었다. 가지고 놀만큼 눈이 쌓이는 일도 드물었고 해가 일찍 지고 워낙 추우니 집 멀리서 놀 수도 없었다. 아침에 다릿가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보면 무섭게 흐르는 계곡 물을 보며 어디까지 얼었나, 구경하고 큰 돌을 찾아 아래로 던져 보는 것이 겨울에 하는 일 중 하나였다. 


 설날을 보내고, 대보름 달집을 태우고, 학교에서 겨울방학 동안 먹으라고 준 멸균 우유 두 박스를 다 먹는 동안 겨울은 흘러갔다. 개학을 한 학교 옆 실개천은 넓고 깊은 가운데 부분부터 조금씩 녹아 물 흐르는 소리를 냈고, 시간이 더 지나서 학교에서 가장 큰 버드나무 가지에는 연두색 싹이 돋아나고 수돗가 옆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피워 냈다. 병설 유치원 아이들은 빨간 볼을 하고 제법 익숙해진 운동장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4월이 되고 한참이 지나도 학교 정문에서 운동장 너머로 보이던 천왕봉은 흰 눈을 덮은 채였다. 산의 봄은 참 더디게 왔다. 


 도깨비집에서 이사해 올라온 초코집 거실 컴퓨터 책상에 앉으면 커다란 산 하나가 보였는데 봄이 되면 그 산에 하나 둘 산벚나무가 꽃을 피웠다. 마른 나뭇가지로 뒤덮인 칙칙한 겨울 산에서 작은 연두 빛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운데 어느 날 그 사이에서 거의 희다시피 한 분홍색의 벚꽃이 피어 있는 걸 볼 때는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나를 둘러싼 산과 숲, 꽃과 풀들을 특별할 것 없이 당연하게 여겼던 어린 시절도 봄이 오는 것만큼은 조금 설레었는데 그래서인지 이른 봄에는 아침에 짧게 뒷 산에 올라 새로 올라오는 고사리 순도 구경하고 진달래가 핀 곳까지 다녀오곤 했다. 



 이 곳, 엘에이에도 겨울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해가 길고 쨍쨍한 날을 좋아해 하지가 지날 무렵부터 서운해하는 나는 온화한 이 곳의 겨울도 그리 반갑지는 않지만 새파란 하늘과 문득 불어오는 찬 바람에 이미 10년도 더 지난, 지리산에서의 겨울이 많이 그리워진다. 물론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도. 그때의 모든 계절과 시간과 공간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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