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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녀미 Apr 30. 2020

[혼자, 지리산] 5. 천왕봉을 가지 않는 일탈

천왕봉을 코앞에 두고 가지 않기로 결정한 나... 좀 멋있다

 나는 굳이, 새벽에 천왕봉을 갔다가 다시 산장에 돌아와 아침을 먹고 내려갈 계획이었다. 해가 뜬 뒤의 제석봉 부근의 길을 걷는 기분이 너무나도 좋아서. 그것도 가방을 매지 않고 걸어야만 그 기분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러기로 했다. 천왕봉에서 바로 하산을 하는 게 시간과 체력을 아낄 수 있겠지만 효율이라던가 합리성이라던가 하는 것을 따지려면 애초에 산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굳이 시간을 내서, 굳이 돈 들이고 탄소 발자국을 남겨가며 이 시골에 와서, 굳이 힘들게 산에 올라서 인스턴트 요리와 설익은 밥을 먹고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설치러...


 무엇인가에 익숙해지면 그중에서도 유난히 좋은 것들 만을 고르게 된다. 뷔페에 몇 번 가보면 김밥이나 감자튀김보다는 특별히 맛있는 샐러드나 스시 위주로 먹게 되고, 자주 간 놀이공원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놀이기구만 타는 것처럼 나는 이번 지리산에서 벽소령-세석-장터목-제석봉 구간만을 간다. 능선으로 들고 나는 길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이러나저러나 길고 긴 오르막 또는 내리막만 이어지는 곳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터목까지 오면 당연하게도 천왕봉을 오르고, 천왕봉은 지리산의 정상일뿐만 아니라 꽤나 상징적인 곳이지만 나에겐 큰 의미는 없다. 이번엔 함께 오들오들 떨며 아침 첫 햇살을 기다릴 사람도 없으니 일출을 맞기까지의 천왕봉이 얼마나 혹독하게 추울지도 걱정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난밤의 대피소가 너무 더워서 잠을 설친 탓에 새벽 네시의 나는 너무나도 비몽사몽 했다. 이렇게 일출 보러 가는 길을 스킵할 수 있다니, 혼자 하는 산행은 정말 최고구나,라고 잠결에 생각했다.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이 북적이며 우르르 몰려 나가고 해가 뜰 시간이 한참 지나 창문이 밝아올 때까지 느긋하게 늦잠을 즐겼다. 나 말고도 몇몇 분들이 일출을 포기하고 느긋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쩐지 조금 동질감이 느껴지는 그분들과 아침 인사를 나누고 하산 계획에 대해 주고받으며 주섬주섬 짐을 정리했다.

이미 천왕봉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취사장 구석에 가방을 세워두고 산책 삼아 제석봉으로 향했다. 지난 오후에 앉아 시간을 보냈던 전망대에 다시 걸터앉아 산 아래 동네들을 내려다보았다. 어제저녁 반대 편 산그늘에 잠겨 있던 계곡은 오늘 아침에도 다른 쪽 산의 그림자 안에 있었다. 저녁에 일찍 찾아오고 아침이 늦게 오는 그곳은 내가 살았던 곳처럼 겨울도 참 길 것이었다.


 춥지 않은 지리산은 날벌레와 파리들이 성가셔 한동안 싫어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풍경을 그리 괴롭지 않게 오래오래 바라볼 수 있다는 점만큼은 너무나도 좋다. 겨울의 지리산은 아름답지만 한참 걸어 몸이 덥혀진 순간이 아니고서야 그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하기엔 너무나도, 혹독하게 추웠다. 해가 뜬 지 한 시간 반이 지나 모두가 내려간 제석봉에서 아무리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풍경을 혼자서 오래오래 누렸다. 천왕봉을 코 앞에 두고 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묘하게 일탈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전망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낮은 난간에 팔을 올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발아래로 한참이나 멀리 산과 나무들이 보이고 아래에서 바람까지 불어오니 패러글라이딩을 했던 때처럼 하늘을 날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가능하다면 더 오랫동안 혼자 머물고 싶었다.



스모어 하나면 대피소 인싸가 된다 :)
나의 여행메이트 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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