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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녀미 Mar 17. 2020

[혼자, 지리산] 4. 늦은 오후의 제석봉

나는 이 순간과 이 장소를 가장 사랑하게 되었다 

 왜 지금까지 이른 저녁에 제석봉에 올 생각을 못 했을까. 아니 사실 중학교 때 몇몇 남자아이들은 저녁밥을 하기 전에 체육쌤과 함께 제석봉이 다녀오곤 했었지만, 그때의 나는 지리산 자체에 끌려온 거나 마찬가지였어서 굳이 자발적으로 고행을 추가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는 산행도 고행이었지만 체육쌤과 함께 간다면 그건 그야말로 최악이라고,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시간도, 체력도 너무 많이 남긴 채로 장터목에 도착했다. 세시에 세석에서 출발해서 장터목에 도착한 시간이 네시였으니 딱 한 시간이 걸린 셈이었고 거의 세석에 다시 다녀오고도 침상 배정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짐을 풀고 손발과 몸의 땀을 닦은 뒤 옷을 갈아입고 남은 롤리폴리와 귤을 먹으며 책을 한참읽었는데도 오후 다섯 시가 약간 지나 있을 뿐이었다. 지난 십 년 동안은 거의 천왕봉에서 일출을 본 뒤 바로 중산리로 하산하느라 어둠 속에서만 지나쳤던 제석봉을 잠시 다녀오고 싶었다. 어쩌면 내일도 제석봉을 어둠 속에서만 지나치게 될지도 몰랐다. 중학교 때는 일출을 보고 다시 산장으로 내려와 백무동으로 하산했는데 그때 일출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만난 이른 아침의 제석봉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기 전, 적당히 선선한 이른 아침의 제석봉 길을 가방도 없이 걸으면 몸이 너무 가벼워서 돌들 사이를 타박타박 건너뛰다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천왕봉까지는 1.7킬로이지만 제석봉까지는 600미터. 첫 시작만 가파르지 얼마 후에는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지니 왕복 한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일출을 보기 위해 헤드렌턴을 켜고 앞사람의 발만 보며 개미처럼 오르는 그 길을,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가볍게 총총 뛰어올랐다. 내가 원해서 하는 산행이란 이렇게 즐겁구나 하고 새삼 놀랐다. 


 아직 해가 지려면 한 시간도 더 남았지만 고사목들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산 아래 계곡부터 서서히 산의 그늘에 잠긴다. 사람은 없고 새소리와 바람 소리만 흩날리는 이 시간의 제석봉은 지금까지 내가 겪은 지리산의 순간들 중 손에 꼽히게 좋다. 십오 년 전에는 고사목들이 더 많고 푸른 나무는 더 적었던 것 같은데 느낌이 그런 건지 실제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지금 이 시간이 너무나도 눈부시고 말로 다 할 수 없이 좋다는 것뿐. 문득 죽는다면 여기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내일 새벽이면 백오십 명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지나갈 테니 그때는 생각이 바뀌겠지. 그토록 북적이는 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이 지금 이 곳은 적막하게 아름답다.


 멀리 산 아래로 아마도 중산리일 마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그 오른쪽 산 너머에는 내대마을이 있겠지. 그 마을에 내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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