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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녀미 Feb 20. 2020

[혼자, 지리산] 3. 내가 살던 그 마을

산길을 걷다 떠오른 열한 살의 기억

 세석 부근의 멋진 뷰 포인트, 예를 들면 촛대봉이나 174계단 직후 커브 길에서 내려다보면 작은 마을 하나가 보인다. 굴러도 한참을 굴러 내려가야 닿을 그 산 아래 마을에 내가 살았다.  


 사촌들과 함께 여름방학을 보낸 뒤 지리산에 남기로 결정한 나는 4학년 2학기가 시작함과 동시에 전교생이 오십 여 명 남짓인 작은 학교의 '서울서 온 전학생'이 되었다. 몇 명 되지 않는 같은 학년  아이들과 친해지는 건 금방이었지만 담임선생님의 사투리를 제대로 알아듣고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고 그보다도 더 오래 걸린 건 다른 아이들처럼 계곡의 돌 사이를 뛰어다니는 일이었다. 


 한참 옛날에는 '내대 초등학교'였다는 '내대 야영장' 안쪽 수돗가 옆에는 계곡으로 통하는 길이 하나 있었는데 그 길을 통해 계곡으로 가려면 세차게 물이 흐르는 바위 두 개 사이를 살짝 뛰어서 건너야 했다. 지금도 쫄보 겁쟁이이지만 그때는 내 팔과 다리, 몸통, 근육, 순발력, 유연성.. 그 어느 것에도 자신이 없던 몸치 쫄보 겁쟁이였기 때문에 그 얼마 되지도 않는 간격의 바위를 톡, 하고 건너뛸 수 조차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나 때문에 모두가 그 지름길을 두고 멀리 돌아 계곡으로 들어가야 했고 얼마 후에는 누군가가 중간에서 손을 잡아 주어서 멈칫멈칫하다가 결국 건너뛰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는 누가 내 책가방을 대신 들어주면 혼자 건너뛸 수 있었고 결국은 온전히 혼자 그 구간을 지나게 되었다. 이제는 여전히 겁은 많은 편이지만 계곡에서는 바위들 사이를 잘 헤집고 잘 건너뛰고 다닌다. 맨발 아래 뜨거운 돌의 열기와 단단한 안정감, 손으로 살짝 바위를 짚을 때의 까슬한 촉감 같은 것들이 생생하다. 그때는 여벌 옷을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다. 벗을 수 있는 옷은 벗어서 검은 바위 위에 널어두고 남은 옷은 입은 채로 따뜻한 바위 위에 올라가 바위를 안으면 찬 계곡물에서 차게 식었던 몸이 덥혀지며 옷도 말랐다. 그러다 잠이 들어 맥반석 오징어처럼 구워졌던 날들이 셀 수 없이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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