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좋을 줄 알았다면, 진작 혼자 올 걸.
혼자 산 길을 걷는 내내 머릿속에서 수많은 글감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내 생각과 머릿속의 풍경을 묘사하기 좋은 단어들도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미국에서도 혼자 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면 평소보다 생각 속 언어가 풍부해지기는 하지만 대체로 일상적인 주제들인 것에 반해 산길을, 그것도 지난 반년 간 내가 꿈에서도 그리워했던 지리산을 걷고 있으니 한동안 잊고 있던 풍경들과 꼭 제대로 적어두고 싶은 생각들이 많이 떠올랐다. 머릿속의 이미지로 존재하는 그것들을 문장으로 만들어내려 애쓰다 보니 걸어야 할 남은 거리가 자꾸자꾸 빠르게 줄었다. 제대로 적어두지 않고 산에서 내려가면 많은 것들이 거품처럼 사라질 것을 알기에 오타를 잔뜩 내며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두느라 바빴다.
벽소령에서 세석으로 가는 길은 지리산의 전체 구간 중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길이다. 그래서 남은 길이 줄어드는 게 아쉬워서 아끼며 조금씩 걷는다. 내가 사랑하는 이 길은 큰 무리가 없고 잔잔하게 다채롭다. 한 번에 오르지 못할 엄청난 오르막도 없고 불안감이 엄습하는 끝없는 내리막도 없이 적당한 오르막과 내리막, 중간중간의 엄청난 뷰 포인트, 꼬마새가 과자 먹으러 오는 선비샘, 너무 멋진 풍경에 좀 앉아 있다 가고 싶지만 낙석주의구간인 절벽길도 있다. 174계단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그냥 천천히 오르면 된다. 이 길은 어느 계절에나 아름답지만 특히 요즘 같은 늦봄에는 철쭉이 유난히 아름답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적당히 키 작은 나무의 연두색 잎들과 연분홍 철쭉꽃이 새파란 하늘 위에 촘촘히 뿌려진 모습이라 내 마음대로 '꽃 하늘길'이라 이름붙이 그 길이, 내 기억 속에서는 실제보다 더 평탄하게 길었다. 꽤 오랫동안 그 길이 이어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석이 나타난다는 인상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 길을 걸어보면 조금 다르다. 꽃 하늘길은 한 번에 쭉 이어지는 긴 길이 아니라 고작해야 삼십 미터쯤 될까 싶은 짧은 길이 여러 번 나오고 그 사이사이에 가파른 오르막이나 고개를 돌아 나가는 아슬아슬한 돌 길 같은 것들이 있다. 무려 174계단도 꽃 하늘길 중간에 있는데 내 기억 속의 꽃 하늘길은 언제나 산책길처럼 평화롭다.
그립고 또 그리운 지리산 살던 시절. 또는 그 이외의 옛날 시절들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한참이나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순간이 다 좋았고 아름다웠던 것 같은데 사실은 유난히 좋았던 순간들은 기억처럼 그렇게 많지 않고 대부분이 평범하고 무난한 날들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너무 힘들고 아파서 울었던 날들도 분명히 있었을 텐데 내 기억은 그런 것들을 최대한 지우고 좋았던 기억들을 많이 남겨 자꾸 되돌아보고 곱씹었다. 그 날들로는 지리산처럼 되돌아 갈 수 없지만 문득 이런 날 돌이켜 본다. 그 날들의 나는 어떤 일로 행복해하고 어떤 일로 괴로워했는지. 어떤 일이 나에게 꽃 하늘길이었고 어떤 일이 174계단 길이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