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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녀미 Feb 04. 2020

[혼자, 지리산] 1. 지리산의 품에 들어서다

내 고향, 지리산. 

 결혼해 남편을 따라서 온 미국에서 사는 일이 힘들거나 외롭지 않으냐고 사람들이 가끔 묻곤 했다. 친구들의 모임 소식을 들을 때 아쉽고 한국의 길거리 음식이 그리운 것 말곤 딱히 어려움 없이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난 향수병 같은 것도 없나 보다, 하고 지냈다.

 그러다 지난 봄, 티비 프로그램에서 나온 지리산의 풍경에 눈물이 또르르 볼을 타고 흘렀다. 그 후로 일주일 가까이 유튜브에서 온갖 지리산의 풍경과 장면이 담긴 영상을 보았고 밤엔 훌쩍거리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지리산을 향한 나의 향수병은 늘 있어왔다. 열아홉 살이던 2009년 11월에 지리산을 떠나 일산으로 이사하던 그 날 이후로 늘 지리산이 그리워서 매년 겨울 종주를 했었고 그 힘으로 또 일 년을 살곤 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은 서울이지만 11살부터 19살까지 지냈던 산청이 내 고향 같아서, 누가 고향을 물으면 '태어난 곳은 서울인데 마음에선 지리산이 고향이에요' 하고 말해왔다. 그런 지리산에 한 3년간 가지 못했으니 향수병이 생길 만도 했다. 


 그래서 이번 한국 방문은 '치과 치료받기'와 '지리산에 가기'를 가장 중요한 일정으로 정해두고 다른 것을 모두 그것에 맞추었다. 아주 오랜만에 혼자 지리산 능선을 따라 걸으니 생각할 시간이 많았고, 그때 떠오른 생각들을 글로 적어두었던 것을 정리해 남겨본다. 




2019.05.22 함양 시외버스 터미널 / 음정으로 향하는 군내버스에서 쓰다


 지리산은 부드럽다. 아주 높은데도 너무 커서인지, 아니면 애초에 이 산이 그렇게 생겨먹은 건지 전혀 위압감이 없다. 산자락 어느 동네에서 산을 바라보아도 대단한 절경은 아니다. 설악산은 조금만 다가가도, 아니 그냥 멀리서 보아도 '아 저게 설악산이구나!' 할 만큼 큰 존재감을 뿜어내는데 지리산은 그렇지가 않다. 하도 큰 데다가 둥글둥글한 모양새이기까지 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산이고 산이 아닌지가 모호하다. 이십 년도 더 된 옛날, 처음 지리산에 왔을 때 아빠에게 '어디가 지리산이야?' 하고 물었더니 아빠는 '지금 보이는 게 다 지리산이야' 하고 말했다. 내가 아는 '산'은 뾰족하게 세모난 모양의 어떤 것이었는데 지금 우리가 지리산에 있고, 보이는 것들도 다 지리산이라는 설명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그렇게 커다랗고 부드러운 지리산에 왔다. 함양 터미널에서 나와 주위를 둘러보는데 어쩐지 자꾸 눈물이 나려고 했다. 


 함양 읍내를 돌아다니다 다이소를 발견했다. 까먹고 두고 온 물통 대신할 것을 구하러 그릇가게나 만물상(웃기지만 내가 어릴 적 덕산에는 정말로 만물상이 있었다. 난 그곳에 운동회 준비물이었던 흰 스타킹을 사러 갔는데 흰 스타킹이 망사밖에 없어서 체육복 바지 안에 흰 망사 스타킹을 입고 포크댄스를 췄다..) 같은 곳을 찾고 있었는데 갑자기 씨유가 나오고 다이소가 나와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심지어 다이소는 반짝반짝한 2층짜리 건물이었다. 하긴 덕산에 씨유가 들어온 게 벌써 십 년이나 된 일이니 함양에 다이소쯤이 있는 건 조금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른다. 


 고속터미널에서 버스 출발 시간을 4분 남기고 함양행 버스에 올랐을 때, 기사님이 배낭을 짐칸에 실어야 한다고 했다. 한동안 이 쪽 사투리를 들을 일이 없던 터라 약간은 소리치는 듯 한 말투에 주눅이 들어 "제가 여기서 꺼내야 할 게 많아서요...." 했더니 또 뭐라 뭐라 날 혼내시는 듯 한 기사님의 다그침이 따라왔다. 결국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부랴부랴 내 자리에서 짐을 정리한 뒤 가방을 가지고 내려 짐칸에 싣는데 기사님에 옆에서 '가방 끈 단디 정리하라'시며 주섬주섬 나를 도와주셨다. 그래... 이 동네 사람들이 이랬었지... 싶었다. 첫인상이 무서웠던 기사님은 내가 휴게소에서 버스를 갈아타는 것과 짐을 내리고 새로운 버스에 싣는 것 까지 도와주시고는 쿨하게 손 흔들며 원래의 버스로 돌아가셨다. 


 모처럼 제대로 된 '이 쪽' 사투리를 들으니 참 반가웠다. [알쓸신잡]에서 유시민 작가가 표현한 바에 의하면 '니그쿠니 내그쿠지 니안그쿠면 내그쿠나' 하는 식의 말이다. 부산이나 대구의 말씨와는 다른 이 쪽 특유의 억양이 있는데 처음에는 알아듣기도 어렵고 사납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말들에게서 향수를 느낀다. 다이소에 들러 물병을 계산하다 계산대 직원분에게 근처 맛있는 중국집에 대해 여쭤봤는데 죄송해요, 잘 모르겠어요, 하는 말투가 어찌나 귀엽던지 자꾸자꾸 말을 걸고 싶었다. 


 함양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음정으로 가는 길은 꽤 멀었다. 이십 분 가까이 달렸는데도 인월이니 마천이니 꽤 큰 정류소들을 거치는 중이었고 산속으로 들어가려면 한참이나 남은 듯했다. 이십 분 정도를 더 달리자 낯설지만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버스는 계곡과 가까워졌다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한참을 더 달렸다. 계곡에는 낡고 허술해 보이는 철판 다리와, 뜨거운 햇빛에 달궈진 검고 흰 바위들, 작은 물고기들이 쉬어가던 풀숲이 있었다. 내가 살던 마을의 계곡 중류와 비숫한 모습이었다. 계곡 아래, 커다란 바위들 사이 어딘가에 수영도 못하고 돌 틈을 잘 뛰어다니지도 못하던 열한 살의 내가 있을 것만 같았다. 세차게 흐르는 물소리에는 여백이 없었지만 어쩐지 적막하고 고요한 풍경이었다. 이따금씩 물새가 낮게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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