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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녀미 Feb 21. 2024

채칼에 손을 썰고 아팠던 날.

만 이틀전에 채칼로 당근을 슥슥 썰다가 내 손을 썰었다. 처음에는 '아 이랬네' 하며 얼른 물로 헹구고 밴드를 붙인 엄지로 눌러 지혈하다가, 그래도 손을 써야 일들이 있어서 밴드를 눌러 붙인 채로 두었다. 생긴 상처가 꽤 아파서 중간중간 아이싱을 하기도 했지만 지혈은 얼추 되었겠거니 싶었는데 막상 밴드를 갈려고 하니 상처와 밴드가 딱 붙어 있어서 피가 덜났던 것 뿐인지 밴드를 떼자마자 피가 줄줄 흘렀다. 밴드를 떼어내는 것도 너무 아픈데다가 막상 상처가 열려 있으니 너무 끔찍하게 잘려나가 있어서 나는 다른데에 시선을 두고 다치지 않은 손으로는 내 허벅지와 옆구리를 꼬집었다. 


그에 비해  빙수는 내가 아프다고 앓는 소리를 내는데도 프로답게 내 상처에 붙어있던 밴드를 요리조리 조심스레 제거하고 필요한 처치를 했다. 아픈 와중에도 빙수의 모습이 너무 의연하고 듬직해서 병원에서의 수련이란 정말 대단하군 하는 생각을 했다.


이틀이 지난 지금은 상처 위의 밴드를 떼어도 내가 못 볼 정도는 아니다. 놀랍게도 내 몸이 열심히 일해서 세포를 만들고 손 끝을 재건하고 있다. 당일만 해도 너무 순식간에, 너무 일상적인 상황에서 일어난 일인데다가 새끼손톱의 반도 안되는 크기가 잘려나간 것 치고 통증도 심하고 피도 많이 나서 자괴감이 많이 들었는데 지금은 여전히 불편하긴 하지만 상처의 단면을 보며 조금 감탄을 한다. 몸의 회복력이란, 재생력이란 정말 대단하구나 싶어 조금 감동했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될 수 없었던 존재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렸다. 


저녁을 먹고 아파트 짐에서 잠시 걷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노랗게 불 켜진 우리 집을 밖에서 바라보며 문득 상상했다. 이렇게 집 안에 들어갔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보리가 거실에 널부러져 있는 상상. 집으로 들어간 내 다리에 머리꿍 인사를 하는 상상.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은 한 김에 소망을 조금 더 얹어본다. 사실 상상조차 어렵지만, 엄마가 우리 집에 와 있는 상상.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뭉클하고 울컥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문을 열자 보리도 엄마도 없지만 아늑하고 따뜻한, 저녁먹고난 뒤의 우리집 냄새가 포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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