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마트료시카와 같다는 생각을 하며 쓴 시다. 내 뜻대로 살아왔건만 지금껏 완성된 그림을 보고 있자니 한없이 낯설게 느껴진다. 나무도, 숲도 보지 못한 채 땅바닥 또는 푸르딩딩한 하늘만 보며 걸은 것 같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거대한 삼림에 갇혀 고개를 가누지 못한 꼴이다. 나이가 들면서 흐릿한 건 명확하게, 다망(多望)함은 진득함으로 정돈이 될 줄 알았다. 도서관 책장에 꽂힌 책처럼 지식을 채워 넣고 인간관계나 진로 어느 부분에서든지 지혜로운 인간의 언저리 즈음은 되리라, 그렇게 마음먹었다. 그러나 소극적인 태도도, 부족한 용기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거저 뒤집을 수 있는 게 절대 아니었다.
수입을 위한 일을 하면서도 원하는 쪽에 발을 담그기 위해 발을 굴렀다. 나태하고, 소극적이고, 자존감이 부족한 나를 질책했다. 자신 없는 결과를 피하기 위해 과정을 포기한 적도 많았다. 어릴 적부터 스스로를 독립심이 강하고 자유분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보통의 현실에 안주해 버리고 말 때면 더없이 불안했다. 그럼에도 나를 완전히 놓아버린 것은 아니어서 ‘지금의 나’와 ‘달라진 나’를 상상 속 천칭 위에 올려놓고 저울질했다. 스물, 스물셋, 스물다섯···낭비된 과거의 시간을 보상받으려 조급하게 굴었던 아득한 어제가 떠오른다.
열렬한 고민의 흔적이 물리적인 시간에 의해 바래지고 나자 분명해진 것이 있다.
어차피 삶은 하나의 길이 아니며
멈추지 않고 발을 내딛는 자욱이 곧 길이 된다는 것,
얽히고설킨지도를 붙든 채 되려 헤매지 말고 묵묵히 나만의 길을 일주해야 한다는 것,
어제는 지나간 해와 함께 저물었지만 3을 보내고 4를 얻었으니 그리 밑지는 일은 아니라는 것도:)
1억 원 가치의 서화를 훼손한 어린이를 선처하며 “작품에 남은 자국 또한 하나의 역사니까 놔두겠다”던 박대성 화백의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나의 삶 역시 복원할 수도, 대체할 수도 없는 유일무이한 작품이다. 시간을 굴리다 생채기가 난 자리엔 거뭇한 침착이 생겼지만, 그 위에 더 새까만 먹으로 도돌이표를 그리려고 한다. 지금까지 깨달았다고 생각했던, 맞다고 판단했던, 집착했던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무(無)의 용기를 낼 것이다.
‘돌아가자. 이제 이 심각한 유희는 끝나도 좋을 때다. 바다 역시도 지금껏 우리를 현혹해 온 다른 모든 것들처럼 한 사기사에 지나지 않는다. ㅡ 그러나 갈매기는 날아야 하고 삶은 유지돼야 한다. 갈매기가 날기를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갈매기가 아니고, 존재가 그 지속의 의지를 버렸을 때 그것은 이미 존재가 아니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다.’ -이문열, <젊은날의 초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