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라는 공간
@unsplash_Jon Tyson
청결함을 다짐하는 향기
부드러운 피아노 연주
간간이 낭랑한 호명
잔잔함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음
연예인 이처럼 새하얀 주광색 조명이 내 치부를 낱낱이 까발릴 것만 같은 곳
멋대로 씹고 마시고 닦아 온 내 이빨에 팩트로 회초리를 때릴 것만 같은 곳
치과에 왔다.
마지막 치과 방문이 언제였는지 떠올리자
묵은 짐을 정리하다 추억에 젖는 것처럼
아련한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친다.
얼기설기 웃자라 무색한 세월들.
그보다 더 부끄러운 건강검진의 여파
의사의 육안은 나의 사랑니, 치석을 들추어내었고
그로부터 또 몇 주 후, 차로 20여 분 거리의 믿음직하다는 치과를 찾은 것이다.
언제나 나보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있기에
나는 언제나 이름을 쓰고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단정한 투피스 정장을 입은 접수원과
치아 관리의 중요성을 설파 중인 TV
의사 한 사람의 화려한 약력
바비랜드를 건설하는 듯한 공사 소리와
치료의 흔적을 말끔하게 헹구고 나온 환자들
유리벽 너머 슬리퍼를 신고 치료에 열중하는 의사까지
모든 것이 잘 정돈된 미래 사회처럼
차분하고 빠르게, 나긋하지만 사무적으로 흘러간다.
"스케일링하기 전에 파노라마 사진 먼저 찍을게요."
"얼마 전 건강검진에서 진찰받았어요."
"그땐 눈으로만 보고 사진은 안 찍었을 걸요? 나중에 따로 찍으시려면 비용이 훨씬 많이 들어요."
"그럼 찍을게요."
오늘이 가장 저렴하다는 말은 이곳에도 있다.
잠시 후 불려 들어간 곳은 녹음 부스를 닮은 방사선 촬영실.
간호사가 안내하는 대로
지지대에 턱을 올리고 입으로 검은색 플라스틱 빨대를 지그시 앙다문다.
눈을 감자 곧이어 시간여행하는 듯 빛이 번쩍인다.
그간 외면했던 이빨들의 안부가 고스란히 기록되는 중이었다.
치과에 온 지 한 시간여 만에 어릴 적 유치를 뺐던 '그 의자'에 앉았다.
모니터에는 좀 전에 찍은 파노라마 사진이 걸려 있다.
빽빽이 팩을 박아놓은 듯한 내 이빨들을 보자니
뼈와 살이 말해주는 인간이 맞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면서도 약간은 섬찟한 상상을 하게 된다.
명쾌함 속 연륜이 느껴지는 치위생사의 음성.
마시는 마취제를 잠시 머금은 뒤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는다.
포복하듯 의자를 기어오르니
입만 뚫린 면직물이 얼굴을 덮는다.
샴푸 할 차례 같지만, 감겨지는 건 머리가 아닌 이빨이다.
"아파서 못 참겠으면 왼손 들어주세요."
교정으로 치과 만렙이 된 동생이 언젠가 말해준 적이 있다. "이빨의 신경은 전문가들도 가늠하지 못할 때가 있어 아프면 참지 말고 바로 얘기하는 게 좋다"고. 고치러 왔다가 다치고 갈 순 없으니 인내심은 반만 발휘하기로 한다.
쇠로 만들어진 아주 얇은 책갈피가 이와 이 사이를 쑤시는 느낌.
석션은 소리꾼 옆에서 북을 치는 고수처럼 신명나는 움직임을 거든다.
왼쪽에서 오른쪽
위에서 아래
무거운 이불을 빨랫줄에 억지로 걸치듯
입을 요리조리 고정시키는 치위생사의 손놀림을 느끼며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입이 작아 죄송해요.'
역시 이번에도 못 참을 통증이란 없었다.
작업을 마친 치위생사는 간략하게 내 치아 상태를 설명했다.
앞니 아래쪽만 치석이 조금 있었을 뿐이라고.
양치할 때 그 부분을 조금 더 신경 써서 하라고.
여기 원장님이 사랑니에 일가견이 있는 분이라는 멘트와 함께 인생 두 번째 스케일링이 종료됐다.
헹군 입을 닦으려 티슈를 뽑으니 치위생사가 순간 화들짝, 웃으며 등을 토닥인다.
"그건 이미 다 쓴 휴지예요ㅋㅋ"
티슈 갑이 마스크와 핸드폰에 가려진 탓에 남이 버리고 간 것을 잡아든 것이다.
입 헹구는 컵을 올려놓을 줄도 모르고
새 티슈와 헌 티슈의 구분도 하지 못한 채 뚝딱거리던
병원이 싫고 어색한 나에게
치과라는 공간은, 이런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