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빅 Jan 11. 2019

중딩 아들 엄마라는 극한직업 (2)

# 02   구설수 ㅣ  시비하거나 헐뜯게 되는 말을 듣게 될 운수


아이가 하굣길에 당한 교통사고는 경중만 따진다면 그의 지난 열다섯 해를 통틀어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되새김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나 사고 정황을 봤을 때 부상이 크지 않았다는 점은 다행한 일이었다.


치료 목적으로 착용해야 하는 보호장구 때문이기도 했고, 예정된 외래 진료가 여러 건이라 회복을 위해 집과 병원을 오가며 지냈다. 일주일을 보내고 등교를 앞둔 어느 늦은 밤이었다. 아이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이의 몸 상태를 염려하신 일상적인 연락일거라는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같은 반의 한 아이가 다른 아이들로 인해 마음이 상하는 경험을 하게 되어 선생님께 고충을 토로했다는 이야기로 운을 떼셨다. 스물여남은 명의 개성이 다른 남녀 아이들이 교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장시간 부대끼던 중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실없는 말 한마디라도 보태어 다른 아이 마음에 스크래치를 만드는데 한몫했다고 지목된 무리에 아들 녀석을 포함한 무신경하고 조심성 없는 사내아이들이 우르르 끼어 있었다고 한다.


선생님께서는 이에 대해 상황을 파악하여 해결해보고자 고심 끝에 밤늦은 시간에 전화를 돌리고 계셨던 것이다. 아이와 연관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처음 받아보는 연락이라 가슴이 철렁해왔다.


통화를 마치고 시간을 확인하니 밤 12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다음날 등교를 앞두고 이른 잠자리에 들었던 아이를 깨웠다. 통증으로 인해 바른 자세로 앉지도 못하는 아이를 테이블 앞으로 불러 고쳐 앉게 했다. 마주 앉아 상황을 들려준 후 나는 묻고 아이는 대답했다. 두 시간 가까이 아이를 채근했다. 아이는 시간을 되돌리고 아무리 곱씹어도 평소 친분 관계가 크지 않았던 해당 여자아이를 특정하여 직접적으로 나쁜 언행을 한 적이 결코 없었다는 대답만 반복할 뿐이었다.


좋다, 그렇다면 해당 아이의 입장에서 네가 오해를 살만한 행동이나 상황이라고 생각되는 것들,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생각나는 모든 것을 끄집어내어 옮겨 보라고 말하면서 빈 종이를 건넸다. 나의 아이는 급기야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쳐가며 꾸역꾸역 빈 종이를 채워 나갔다. 좀 전까지 내 앞에서 항변하며 뱉었던 이야기가 고스란히 글로 옮겨져 있었다.


아이는 일관되게 저항했다. 결코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이의 편에서 본다면, 아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보다 억울한 일이 어디 있으랴. 늘 내편이라 여겼던 나의 엄마가 테이블 너머에서 두 눈에서 레이저를 뿜으며 팔짱을 낀 채 다그치고 있으니 말이다.


잠결에 불려 나와 눈을 껌뻑거리며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 아이. 기민한 아이들에 비한다면 둔한 편이고, 영민한 아이들과 놓고 보자면 꽤나 눈치가 없는 편인 이 아이를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좋을까. 대관절, 이 야심한 밤에, 아픈 아이를 앉혀놓고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목소리를 누르고 아이에게 찬찬히 일렀다. 사람 간의 감정이란 게 상대적인 것이어서 행여 의미 없이 지나가며 흘린 말이라고 해도 누군가에게는 상처일 수 있다고. 친한 친구들 사이에 오고 가는 한낱 너스레가 되었든, 치기 어린 농담이었든 간에 같은 반의 아이와 그의 부모가 언짢음을 표현했고, 그 과정에서 너의 이름이 거론되었다는 것은 평소 본인의 언행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새 학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아이, 그리고 아이와 친한 몇몇 녀석들 무리는 자잘한 에피소드를 양산했던 전적이 있다. 산만한 개구쟁이들인 이들은 선생님들 사이에서 진작에 '잠재적 사고유발자 그룹'으로 포지셔닝되었다는 것은 몇몇 사례에서 예상가능한 일이었다. 누군가에 의해 손쉽게 붙여진 이 꼬리표는 아이들에게 이로울게 하나도 없었으며, 나름의 억울함을 호소해 본들 조리 있게 말을 하는 것이 서투른 사내 녀석들의 말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지도 모를 일이다. 답답한 상황이었다.


우리 집의 가련한 중2 남아 입장에서 다시 생각을 해보았다. 해당 아이의 상황도 들어보고 사과가 필요하다면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혹여 내 아이가 이토록 억울해하는 진짜 이유가 있다면 오해도 풀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격변의 중딩에게는 아직까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미묘한 온도차를 감지할만한 센서가 탑재되어 있지 않은지라 부딪혀서 일깨울 기회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정공법이 답이었다.


담임 선생님께 연락을 드려 도움을 청했다. 선생님께서 배석한 가운데 해당 아이와 부모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예상대로 나의 아이는 그런 자리를 완강히 거부했고, 조언을 구한 주위의 몇몇 선배 학부모들도 내가 택한 커뮤니케이션 방법에 난색을 표했다. 아이들끼리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그 자리에서 사과의 말이든, 오해의 변이든 오고 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나의 문제 해결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날짜가 정해졌고, 선생님과 부모들이 지키는 자리에서 두 아이는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여자아이의 말로는 나의 아이의 특정 언행 중 문제가 되었던 것은 없었다고 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나 여자아이들은 태생적으로 사내아이들과는 좀 다른 감정 센서를 탑재한 탓에 서운함을 느끼는 접점이 서로 달라 발생된 일이었던 것이다.


감사했던 것은 해당 아이의 부모들의 임하는 태도였다. 차분한 자세로 경청해주시고 아이들 간에 벌어진 일에 대해 당사자들끼리 충분히 이야기를 하여 해결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셨다. 아이의 부모들은 직접 만나는 자리를 제안해 주어 오히려 고마웠다고 내게 말해주었고, 나는 불쾌하고 불편한 자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응해준 아이와 부모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사고 후 얼마간의 회복기를 가진 후 등교한 다음날의 일이었다. 보호장구를 한 불편한 몸으로 어정쩡하게 의자에 걸쳐 앉아 어른들에 둘러싸여 잔뜩 얼어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기가 찼다. 눈물이 차오르며 별안간 내 속에서 복합적인 감정이 솟구쳤다.

"네가 지난 며칠 동안 참 많은 경험을 하게 되는구나. 너는 싫어했지만 이번엔 엄마의 일방적인 결정에 따라주어 고맙다. 너의 억울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오해든 아니면 사과든 가장 좋은 해법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 생각했어, 엄마는"


집으로 향하며 아이에게 했던 말이다. 잘못의 경중을 떠나서 진심을 담아 사과하는 것이 진정 힘든 일이고,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나의 아이에 이어 다른 친구들도 같은 방식으로 '1:1 사과 회담'을 거쳤다고 하시며 담임 선생님께서도 순조롭게 매듭을 짓게 되어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하셨다.


"30년 교직생활 중 올해에는 유달리 많은 일들을 겪게 되네요"


선생님께서 통화 중 하신 말씀이다. 웃픈 얘기로 '중2 담임은 액받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의 아이 담임 선생님을 뵈면 딱 들어맞는 별칭 같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새 학기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첫테이프를 끊은 녀석과 그 일당들이 벌인 크고 작은 이벤트만으로도 선생님은 이미 피로도가 쌓이고 넘치셨을 듯하다. 태생적으로 선생님 울렁증이 있던 내가 어느새 친한 친구들보다 더 자주 아이의 담임선생님과 통화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구설에 오르다' 혹은 '구설수에 휘말리다'와 같은 표현은 신년 운수에서나 볼 수 있는 말인 줄 알았다. 내 뜻이 그와 같지 않아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리는 경험이 본인에게 1도 도움되는 것이 없음을 녀석은 알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크면서 자연스레 행동반경이 넓어지기 마련이다. 아빠 엄마에 의해 규정된 울타리 밖을 기웃거리기만 하다가 어느 순간 탁! 넘는 시기가 온다. 나의 아이의 경우 지금이 그때인듯하다. 내 자식만은 그러지 않을 줄 알았으나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지난 몇 달간 녀석이 확실하게 증명해 보였다. 어떻게? 주저함도 없이, 갖은 만류와 저항에도 한치의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그리고 뻔뻔하게...


그렇다. 아이는 지금 바로 뇌구조가 바뀐다는, 호르몬 변화로 감정 기복이 극에 달한다는 이른바 중 2병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녀석으로 인해 널뛰기하듯 버라이어티 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느낀 게 하나 있다. '중딩 남아의 엄마'는 정말이지 일부러 하고 싶지는 않은 극한 직업이라는 것을... 아이가 아닌 나 자신을 탓하며 자괴감에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가 가까스로 헤어 나오기를 반복했던 시간들이었다.

지금도 녀석의 도발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자행되고 있다. 그때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육두문자를 장전한 속사포 랩이 스크래치 창법을 구사하여 밖으로 나오려는 것을 꾹꾹 눌러 삼킨다. 옆집 아이가 겪는 만큼만, 딱 그 정도로만 이 시기를 보내준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아니다. 욕심을 부린다면 바라는 게 한 가지 더 있기는 하다. 지금 아이에게서 일어나는 이 모든 변화들이 알고 보면 길고 긴 아이의 인생에 있어서 더없이 소중한 골든타임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것이 내게 생겼다.


"어머니, 담임인데요, 지금 통화가 괜찮으신지요?"



 



매거진의 이전글 중딩 아들 엄마라는 극한직업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