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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탄재 Jul 12. 2022

불혹의 나이에 봉쥬르를 외치다

얇고 넓은 취미 생활자의 DELF 합격기

  나에겐 탐색 단계에서 빠르게 사랑에 빠졌지만 결국 마음속에 처박아  취미가 많다. 시작할  의욕의 비용으로 지불한 돈은 결국 마음의 빚이 되어 독촉을 받고 있다. 취미 도구들은 언젠가 다시 할 것만 같은 기분에 당근에 내놓지 않고  한구석에 고이 모셔두었다.
 얼마 전 프랑스어 배우기도 나의 얇고 넓은 취미 생활에 포함되었다. 가장 낮은 레벨의 자격증이긴 하지만 자격증 시험도 보았다. 이제 생존을 위해서 궁금한 것은 더듬더듬 물어볼  있을 것 같다 (물론 길게 대답하면 당황하겠지만). 뜬금없이 프랑스어에 관심을 가지게  것은 아니었다. 조만간 해보고 싶은 업무가 프랑스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프랑스어를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본격적으로 달려들지 않고, 천천히 주위를 배회하면서 곁눈질로 훑어보고 싶었다. 딱히 필요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필요 없는 일을 하는 것이 나의 바쁘기만  마음과 권태로운 일상에 리듬을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찔끔 책 하나 사놓고 단어 몇 개 외우다가 바쁘다는 핑계로 흐지부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흐지부지 될 일은 주도적으로 흐지부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정이 정해져 있는 시험을 보기로 마음먹고, 뚜레쥬르 뜻도 모르는 상태에서 덜컥 시험 신청을 해두었다. 프랑스어는 DELF라고 하는 프랑스 교육부에서 공인하는 프랑스어 자격증 테스트가 있다. 돈이 좀 들더라도 자주 보면서 요령을 터득하고 싶었는데, 이 시험은 토익처럼 매월 응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올해는 3월, 5월, 11월에 시험 일정이 있었고, 시험 비용도 14만 원이나 해서 자주 볼 수 있는 시험이 아니었다. 또 이 시험은 자신의 실력에 따라 A1, A2, B1, B2, C1, C2 중 실력에 맞는 레벨을 선택해서 테스트 진행하는데 직장생활을 병행하면서 한 달 안에 독학으로 도전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장 쉬운 레벨인 A1자격증에 도전하기로 했다. 여러 가지 후기들을 읽어보면 A1, A2는 난이도 차이가 미미하기 때문에 보통 A2로 시험을 본다고 한다. 그래서 자격증이 급하면 한 번에 A1, A2를 동시에 응시하는 지원자도 있다고 한다.



 이제 어떻게 최소한의 투자로 합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이미 진짜로 불어로 커뮤니케이션할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자격증에 눈이 멀어버렸다. 이 시험은 청취 / 독해 / 작문 / 구술 이렇게 4가지의 테스트로 이루어져 있고, 청취 / 독해 / 작문을 하루에 치르고 다음날 구술시험 이렇게 이틀간의 시험으로 진행된다. 각 파트별로 25점 만점이고, 총 50점 이상이면 통과할 수 있는 체력장 수준의 시험이었다. 다만 파트 중 하나라도 5점 이하의 점수가 나오면 과락이다. 시험 후기들을 살펴보니 보통 전략을 청취, 구술은 어차피 못하니까 과락을 면하는 수준으로 공부하고 독해/작문 파트에 집중해서 시간을 투자하는 요령이 있다고 한다. 역시 게으름은 효율의 어머니이다.


 나의 박약한 의지와 나약한 정신상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열정과 흥미가 돋은 이때를 최대한 활용해서 아래 몇 가지로 가장 효율적인 테크트리를 계획했다.


1. 아침 출근길 Pimsluer라는 앱 (유료)로 듣기, 말하기 (따라 하기) 연습

2. 퇴근길 시원스쿨 정일영 선생님의 프랑스어 강의 듣기 (라고 했지만 거의 주말에 몰아서 봄)

3. 따로 숫자 (100까지는 꼭 다 알아야 됨), 요일, 달 외우기


불어를 듣는 부분이 가장 어려웠지만 지겹도록 반복해서 듣고 따라 하다 보니 프드(?)에 나오는 간단한 말들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뭔가 발전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핌슬러는 영어로 설명하는 유료 구독 앱이라는 제약이 있지만 반복을 계속 하다 보니 저절로 이해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물론 레벨 1의 이야기이지만) 문법 같은 것은 따로 하지 않았다. 그냥 들리는 대로 보이는 대로 문장 구조를 외웠다. 아는 어휘가 많지 않아서 새로운 단어들은 따로 적으면서 외웠다. 수능인의 요령을 백분 발휘했다. 독학이었기 때문에 구술은 연습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안 하기로 했다. 다만 핌슬러에서 들은 말의 인토네이션과 리듬을 비슷하게 따라 하는 연습을 했다. 오랜만에 뭔가를 꾸준히 하는 나의 모습을 좋아하는 취미를 가진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성실했다.


여유 있는 상태에서 준비를 한 것은 아니었다. 시험날이 가까워 오면서 일도 같이 바빠졌는데, 내 십사만 원과 그간의 시간이 날아가고 있는 기분이 강하게 들 때마다 정신을 부여잡고 헤드폰을 끼웠다. 마흔 넘어서 뭐 새로 배우면 약간 측은한 순간들이 오는 것 같은데, 그중에 하나가 졸림이다. 삼십 분 이상 같은 콘텐츠가 진행이 되면 대부분 눈이 감긴다. 이 기간 동안 출근길에 정류장을 놓친 적이 많다.


 아무튼 시험일이 되어 어린애들 사이에서 사연 있는 사람 콘셉트로 시험을 치렀다. 토요일과 일요일 오전 시간을 몽땅 투자해야 하는 시험이라 주말 일정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떨어지면 그간의 기회비용들 때문에 화가 날 것 같았다. 첫날은 청취 (어려움) / 독해 (쉬움) / 작문 (개인마다 다름) 시험이었고 시험을 보고 나니 다음날 구술시험에 와서 봉쥬르만 해도 붙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대학 캠퍼스 안에서 시험을 치르는 경험은 꽤 즐거웠다.


 십수 년 같은 업무를 하다 보면 간혹 전문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는데, 구체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불안감이 엄습할 때가 있다.  어떤 일에 익숙해진 사람을 전문적이라고 한다면, 익숙하긴 한데 대체할 수 없는가라는 질문으로 파 들어가다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나는 마땅한 진입 자격 기준이 없지만, 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쌓이는 포트폴리오가 자격 기준이 되는 직종에 종사한다. 직장인 대부분이 이런 상태일 텐데, 가끔 '직업인이 돼라'라는 뜬구름 잡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나 보다. 그래서 쓸모없는 소일거리를 하더라도 어떤 '자격'이 주어지는 일을 해보고 싶었나 보다.


 몇 주간 신경을 안 쓰고 있다가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좋은 결과가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좀 더 어려운 걸 준비할 걸 그랬나라는 마음이 잠깐 생겼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제 흐지부지할 다음 일을 고민할 차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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