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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홍 Jan 02. 2021

나이 든 내가 치는 늙어버린 피아노

할머니 다 됐네 이제

우리집 피아노가 몇 살인지 나는 모른다. 1999년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이미 중고였기에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지 못한다. 피아노를 배우기도 전에 들여놓아서 칠 줄 아는 게 없어 엘리제를 위하여를 쳐달라고 매일 엄마를 졸랐다. 2년 정도 뒤에 피아노 학원에서 드디어 엘리제를 위하여를 치게 됐을 때 속으로 무척 기뻐했었다. 새로 배운 좋아하는 곡도 치고 엘리제를 위하여를 엄마보다 잘 칠 때까지 열심히 연습하고 이 피아노로 피아노학원 숙제도 성실히 해갔다.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찬송가도 자주 쳤다. 피아노는 내 따뜻하고 즐겁고 몽글몽글한 순간에 늘 함께했다.







중고라서 무언가 하자가 있어 그랬던 걸까, 가운데 머플러 페달이 잘 듣지 않아 작은 소리로 연주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우리집 피아노가 제일 좋았다. 나는 우리집 피아노 소리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가도 피아노 학원에 가도 우리집 피아노만큼 예쁜 소리가 나는 피아노는 본 적이 없었다. 지금 연주하는 디지털 피아노에는 그랜드 피아노 모드를 여러 개 중 선택할 수 있다 스타인웨이 피아노로 녹음된 멋있는 콘서트홀 버전이나 스튜디오 버전 말고 나는 우리집 피아노 소리와 가장 비슷한 모던 버전을 좋아한다. 부드럽고 웅장하기보단 앞으로 정직하게 치고 나가는 친숙한 소리가 좋아서이다.





피아노는 내가 가장 외로울 때에도 늘 옆에 있었다. 피아노는 큰 창문 아래에 놓여 있다. 창문 너머로는 탁 트인 파란 하늘이 보인다 종종 하늘색이 너무 진하고 파래서 꼭 페인트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땐 이상하게 늘 할 말은 많은데 털어놓을 사람은 없거나 눈가가 빨갛게 헐 때까지 울었거나 살기가 싫은 그런 순간이었다. 피아노를 치면서 하늘을 보면 코를 찌르는 페인트 냄새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떤 날은 피아노를 치면서 소리가 퍼지듯이 물에 빠지는 것처럼 피아노 소리와 함께 하늘에 거꾸로 처박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살면서 피아노를 가장 잘 쳤을 때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입시 스트레스까지는 피아노를 치면서 커버할 수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자연스럽게 피아노 치는 시간이 줄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 집을 나올 땐 피아노를 가지고 올 수 없었다.  이사하고 두 달이 채 안 됐을 때 갑자기 치지도 않던 피아노가 너무 치고 싶어 충동적으로 디지털 피아노를 샀다. 내가 생각한 그 느낌은 아니었지만 꾸준히는 칠 수 있게 됐고 무엇보다 조용해서 요즘 피아노를 열심히 치고 있다. 이제 다시 집에 가면 갈색 업라이트 피아노를 연주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정말 오랜만에 다시 뚜껑을 열고 쳐본 피아노 소리는 예전에 내가 기억하던 그 소리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쳤던 몇 년 전에 이미 줄이 느슨해지면서 음이 조금씩 아래로 밀리고 있다는 것은 느꼈는데 이제는 확연히 음이 낮아진 게 느껴졌고 소리도 뭔가 깨지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이 빠진 그릇을 보는 것 같다. 익숙한 곡, 새로 산 디지털 피아노로 요즘 열심히 치고 있는 곡을 연주하는데도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조금 슬펐다. 내가 돌보지 않은 사이에 엉망이 되어버린 화원을 보는 느낌이었다. 이제 와서 예전 같은 소리와 느낌을 찾기엔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후회도 들었다. 나는 여기서 내 즐거운 시간이나 힘든 시간을 많이도 오래도 보냈는데 내가 너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생각이 들어 피아노에게 미안해졌다. 나는 나이가 들고 있는데 피아노의 시간은 그보다 더 빨리 흘러 아주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십 수년 전의 내가 이 의자에 앉아서 누렸던 즐거움이나 여기서 했던 슬픈 생각들이 떠올랐다. 이제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고 그때의 즐거움도 슬픔도 더는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버린 것 같았다.





앞으로만 가는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너무 당연한 소리지만 이제 피아노 앞에 앉아서 수많은 생각을 하던 어린 여자애는 없다. 찢어져버린 피아노 소리가 그걸 증명한다. 아마 조율을 하고 피아노를 고쳐서 연주해도 그 시간들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때의 소리와 하늘 색깔을 기억하는 나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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