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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지 Dec 22. 2022

어느 라디오의 열혈 청취자가 써본 리뷰

이지혜에서부터 배철수까지, 올 한 해 들은 라디오 프로그램 리뷰 

***네이버 포스트 '오즈앤엔즈'에 기고한 글을 재업로드합니다.




귀에서 피가 날 때까지.
무엇을? 라디오를.




프라이버시 때문에 자세하게 말하긴 뭣하지만, 이번 하는 일의 특성 상 눈과 손으로 일하는 집중도에 비해 귀에 들리는 오디오가 비는 것이 늘 아쉬웠다. 이어폰을 끼고 작업하는 데에는 자유도가 있는 편이라, 하루는 음악을 들었다가 하루는 명상음악을 들었다가. 결국 내가 돌아간 곳은 학생 시절 쥐고 살았던 라디오였다. 라디오를 들어볼까? 정말 말 그대로의 '라디오'를 꺼내들었던 시기를 지나 나 또한 'MBC MINI'와 'SBS 고릴라' 어플을 깔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요즘 듣는 라디오 리스트 



확실히 예전에는 저녁-밤 시간대의 라디오를 즐겨들었다면 회사 출근에서부터 퇴근까지 자연스럽게 소소히 라디오를 듣게 된 것 같다. 라인업에 어쩌다보니 KBS는 없구나. 리뷰를 쓰고 있는 이제사 발견하고 멋쩍어진다. 앞으로는 KBS도 많이 들어봐야겠다 




라디오는 결국 수다다. 
수다 뿐이다.



라디오는 수다다. 말과 말이 끊임없이 오고 간다. 그것도 하루 웬종일. 2시간씩 사람이 돌아가며 또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전하고, 아주 목이 나가도록 말을 할수는 없는 노릇이니 음악도 틀어준다. 음악을 틀어주기 위해 말하는 것인지, 말을 하기 위해 음악을 틀어주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에 다다를 만큼. 증발할 것만 같은 수다에도 '감정'만은 들려온 그 자리에 진득하게 붙어있는 것. 그게 라디오가 아닐지 생각해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잘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던 콩쥐처럼 난감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콩나물 시루를 눈앞에 떠올립니다.

밑 빠진 시루에서 콩알을 콩나물로 키워내는

그 오묘한 이치를 생각합니다.

만약 밑이 빠지지 않았더라면

콩은 퉁퉁 불어 상하고 말았을 겁니다.


(...)


밑 빠진 시루에 물 붓기

콩알에게 높은음자리의 희망가를 연주하게 하는 일입니다

충분히 애를 쓰며 참아낼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 2022년 5월 13일

배철수의 음악캠프 오프닝 중



뭣 같은 하루를 보낼 때가 있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만큼 남을 탓하고 싶은 사건들이 이따금 나를 덮쳐온다. 그러다가 라디오를 들으면, 낄낄 웃다가도 저 멀리서 사는 다른 이가 보내온 편지를 읽다가도 보면 오늘 내가 너무 싫었던 일도 사실은 아주 큰 일은 아니겠단 생각이 든다. 







출근해서 죽을 것같다가도 전철을 타고 한창 회사로 이동하고 있을 때즘 시작하는 김창완의 아침창 오프닝을 듣고 있다보면 그래 또 오늘의 피곤함은 오늘만 짊어지고 또 홀가분하게 가보자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수다를 듣다보면 내가 겪은 일이 작아진다. 아주 큰 바위같은 걱정거리들이 수다빨에 깎이고 깎여 맨들한 자갈이 되는 이 기분. 그래서 나는 자꾸 라디오를 듣는다. 




이 소소하지만 소소하지 않은 수다 속에는 의외의 정보나, 오호라? 싶은 지식들도 있다. 이석훈 라디오를 들으니, 신기하게도 목요일엔 라디오에도 사연이 덜 온다고 하더라. 멍때리며 듣다가도 김창완 디제이가 들려주는 고양이에 대한 의외의 사실에 놀라곤 한다. 매주 금요일 아침 장성규 디제이와 게스트가 주고받는 전설의 동물 해치의 역사, 혹은 김영철의 파워 FM의 대표 코너 타일러의 진짜 미국식 영어를 듣다 보면 아 정말 내가 어디서 또 이런 수업을 듣나 싶어 귀를 기울이게 된다.  




수다를 떨어주는 사람들 혹은 들어주는 사람들
라디오 디제이(DJ)



TV 혹은 유튜브에서 (물론 그들은 맹활약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 띄지 않았던 어떤 이들이 유독 라디오에선 내 귀에 콱 박혀 떨어지지 않더라. 나에겐 이지혜가 그런 디제이였다.  






이지혜의 오후의 발견은, 정말 오후 내내 라디오를 들을 일이 없었더라면 나 또한 들을 기회가 영영 없지않았을까 싶다. 컬투쇼 혹은 두시의 데이트가 끝나고 나서 어디 한 번 이 시간대엔 어떤 라디오가 있을까들어보자니 웬걸 생각보다 맑은 소리 예상보다 훨씬 더 센스있는 진행. 이미 3년 동안 방송해온 '이지혜의 오후의 발견'을 새삼스레 처음 들어본 것이었다. 




고작 두 달을 갓 넘긴 초보 청취자이긴 하지만 사실 해 떠있는 시간대에 방송하는 라디오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도 '오후의 발견(이하 '오발')이었다. 이따금 이지혜의 노래를 들어보면서 목소리가 정말 청아하다 하는 생각은 해봤는데, 이지혜 디제이의 톡톡 튀면서도 맑은 그 분위기가 어찌나 재밌던지. 꼴에 사무실에서 듣는답시고 이를 꽉 깨물며 웃음을 참아낸 적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나에게 오후의 발견이란, 그래 좀 뻔한 말이지만 얘기해보련다. 이지혜의 발견이었고 이지혜가 나눠주는 긍정의 발견이었다. 라디오를 들으면 힘이 불끈 났다. 그래서 최근 소식에 따라 갑작스럽게 들려온 라디오 하차 소식은 정말 수긍하면서도 애청자로서는 안타까운 소식 중 하나였다. 







이지혜의 오후의 발견 중 가장 마음에 꽂히는 오프닝 어구는 이것이었다. "금요일은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었지만, 모른 척하고 집에 가는 날" 모른 척하지만 내일로 미뤄두는 것이야 말로 오늘의 저녁을 위해 기꺼이 비움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어느 날의 오프닝처럼, 이지혜 디제이도 언젠가는 휴식의 기간을 딛고 다시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려보기로 한다. 



말을 위한 음악
혹은 음악을 위한 말



"퇴사했는데, 좋아하는 대리님에게 이제 연락할 거리가 없어요. 어쩌죠?" 걱정하는 문자에 우리의 아침창 디제이 창완 아저씨가 말한다. "방법이 없긴 왜 없어요~ 라디오에 문자 보냈더니 제발 좀 연락 하라고 성화부리면서 이문세의 알 수 없는 인생 틀어줬다고 하세요!" 그리고 이어지는 반주와, '언제쯤 사랑을 다 알까요' 이어지는 가사들. 선곡이 기가 막힐 때가 있다. 사연과 절묘해서 혹은 나의 삶과 맞아떨어져서. 







요즘 나의 플레이리스트는 하루에 한 곡 이상 라디오 선곡표에서 건져낸 곡들이다. 정오의 희망곡에선 꼭 첫 곡을 그 전날 발매된 신곡 중 하나로 꼽더라. 비 오는 날엔 모든 라디오의 선곡이 촉촉해지기도 한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데 휘트니 휴스턴이 부른 영화 <보디가드>의 OST가 나오는 날엔 선곡하는 디제이도 그 노래를 듣는 청취자들의 채팅방도 기쁜 탄식으로 가득찬다. 







나에게 가장 인상깊은 선곡을 꼽으라면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들었던 Enya의 Orinici Flow이다. 




어딘가 익숙한 반주. 몽환적인 멜로디. 사실 라디오 듣는 양에 비해 음악에 대해선 정말 무지하고 문외한인 나인지라 음악을 들어도 그에 붙일 풍부한 표현은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음악이 끝나고 나서, 배철수 아저씨가 음악에 덧붙인 사족이 참 좋았다. "음악 한 번을 듣는다고 해서 사람이 착해질리 없지만, 에냐의 노래를 들으면 내가 좀 착해지는 기분이 든다"고. 음악 한 번에 사람이 선해질 수가 있을까? 근데 그걸 가능하게 하는 노래라니 이 노래를 들을 수록 상상하게 되는 풍경도 서사도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렇게 에냐의 노래들은 나에게 무언의 영감을 주는 노래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후문. 후문 아닌 후문.




시간이 정해진 수다만큼 아쉬운 것이 또 어딨으랴?



아니 듣는 건 매일 같이 거의 모든 라디오 채널에 출석 도장을 찍으면서, 자꾸만 이번 리뷰에서는 배철수 디제이가 해준 얘기들을 인용하게 된다. 생각난 김에 덧붙여볼란다. 배철수 아저씨가 그러더라. 사실 자기가 20년동안 라디오를 진행한 것보다 더 대단한 건, 이 지루한 라디오를 20년 동안 듣고 있는 청취자들이라고. 이게 뭐가 재밌어요? 하고 던지는 반문에 썰렁한 웃음을 나도 모르게 껄껄 지었더라마는, 정말 재미가 없을까? 




라디오에는 2시간, 혹은 1시간 정도의 정해진 시간이 있다.  남은 시간동안 수다 떨어야 하고 수다를 다 털고 가야 한다. 그 날의 사연이나 디제이의 한 마디를 계속 곱씹다가도 광고로 툭 넘어가버리는 타이밍이 허무해질 때가 있다. 시간이 정해진 수다만큼 아쉬운 것이 또 어딨으랴?  




가장 좋아하는 배철수 라디오 오프닝으로, 글을 마무리해보련다. 어버이날. 식구들을 잘 챙겼냐는 안부대신 우린 모두 별의 먼지들이라 꼭 좋은 부모나 좋은 자식이지 않아도 좋다는. 그 날만큼은 이 세상의 어떤 이들에겐 정말 힘이 되었을 오프닝. 




세상에 모든 것이 빛을 내고 반짝여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빛을 내지 않는 놈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죠

우주학자 마틴 리스의 말이 위로가 됩니다


좋은 부모와 훌륭한 자식

너그러운 부모와 사랑스러운 자녀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는 부모와

믿음직해서 자랑스러운 자식


그런 빛나는 조합에서 빠져있어도

어깨를 움추리지 않기로 합니다!


마틴 리스는

"우리 모두는 별이 남긴 먼지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길어야 백 년을 살고

기껏해야 천 년이나 만 년을 돌아보는 우리


너무 시시한 도리를 따지거나

성의의 무게를 재거나

사랑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면서

쪼그라드는 건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40억년에 걸친 진화의 산물

그걸 생각하면 빛나지 않아도 한껏 가슴을 펴게 됩니다


(...)


5월 8일 일요일, 배철수의 음악캠프. ... 출발합니다!


- 2022년 5월 8일

배철수의 음악캠프 오프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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