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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개도리 Jan 25. 2024

수정주의 날랄이 바람 #1

 -20대의 맛본 한국 드라마 -

'수정주의 날랄이 바람'에 흔들린 나의 20대

 '수정주의 날랄이 바람' 북한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보고 자주 사용했을 것이다. 이 표현은 북한이 사회주의 체제를 강화하려고 사상교양 사업을 할 때 사용하는 용어다. 북한 내에서 다른 나라의 영화나 서적, 이색적인 옷차림, 노래 등 사회주의를 무너뜨리는 수정주의 사상이 퍼져나가는 것을 강력하게 막기 위한 대응에 내세우는 표현이다.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도 일상적으로 사용되며 나 역시 이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나의 20대는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수정주의 날랄이 바람'에 흔들렸다. 




2000년 2월!!

북한은 만 17살이 되면 11년제 의무 교육을 마치고 선거권이 주어지며 각자 다양한 사회로 진출하는 시점이었습니다. 나는 17살이 되어 졸업을 하게 되고 어른의 세계를 처음으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나의 고향에서는 2000년도에 들어 한국 드라마가 조용히 흥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마, 그전에도 흥행했겠지만,  제가 2000년도에 한국드라마를 많이 접하게 되어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그 해부터 3~4년간 정말 많은 드라마를 몰래 보았습니다. 


당시 북한 당국의 통제가 그렇게 엄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한국드라마 CD가 많이 돌았습니다. 북한주민들 중에 한국의 언어와 억양에 매료되어 한국말로 말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 사이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생겨났습니다. 

어느 날 한 보안원이(경찰) 한국말을 하는 사람을 단속했습니다. 


"너 한국드라마 봤구나?"(한국식 억양으로)

"잘못했습니다. 응? 그런데 보안원동지도 한국말하네요!!"


보안원이 한국말을 하면서 한국드라마를 봤다고 단속하다가 망신당한 이야기가 퍼져나갔습니다. 

이러한 일화가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시기에 한국 드라마를 많이 접하게 되었고 여전히 20대에 한국드라마 사랑에 빠졌던 그날들과 드라마 제목들이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남자의 향기", "가시고기", "유리구두", "순정", "조폭마누라", "팔불출", "첫사랑", "약속", "호텔리어", "조폭마누라" 등등.


아마 100편은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에 처음부터 완전히 끝까지 본 드라마는 몇 편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은 정전이 자주 되고 한국드라마를 담은 CD가 돌고 돌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친구들과 전기가 들어오는 동네를 찾아 밤을 누비며 드라마 보러 다녔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20대여서 가능한 그 시절의 그 열정이 그립습니다. 


그렇게 감동과 설렘, 재미로 보기 시작한 한국드라마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습니다. 특히 처음으로 본 '남자의 향기'는 매 장면들이 저의 일상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국드라마를 보면 그 여운은 며칠 동안 남아 있어 때때로 멍하고 드라마 세계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재밌는 것은 제가 여자이기 때문인지 남자 주인공 권혁수(김승우)의 모습은 정말 잊히지 않습니다. 저에게서 모든 드라마의 여주보다 남주가 더 인상 깊었습니다. 


나의 고향에서는 조국을 위해 충성하는 사람은 있어도, 여자를 위해 헌신하는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그런 남자는 없었습니다. 


'남자의 향기'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남주의 모습을 보며 저는 한 번만이라도 저런 사랑을 받아 봤으면 죽어도 원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저만이 아닌 친구들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을 할애하며 드라마 앓이를 하였습니다. 한국 드라마와 사랑에 빠진 저의 20대는 "수정주의 날랄이 바람"에 흔들려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하지 어느 날!!


사회주의를 무너뜨리는 "수정주의 날랄이 바람"을 철저히 뿌리 뽑아야 한다는 명목의 비사회주의 구루빠가 나타났습니다.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 시범에 걸리면 추방이나 감옥, 심하면 총살까지 했습니다. 군사복무를 마치고 제대되어 대학생활을 하던 몇몇 청년들이 시범에 걸려 교화소에 갔다는 이야기가 무섭게 퍼지면서 사회에 두려움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한국드라마 '장군의 아들'을 본 제 사촌의 친구가 잡혀갔습니다. 사촌도 '장군의 아들'을 본 것이 들통났지만 돈이 많아 뇌물을 주고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저도 '장군의 아들'을 몇 부를 봤습니다. 제가 본 중에 이 드라마에서 북한의 절대적 권위의 항일투쟁시기를 몇 마디 언급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런 드라마를 보다가 발각되는 경우 엄청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한 번은 제가 다니던 직장 담당 보안원이 사람들에게 "도둑질하면 했지 한국드라마 보지 말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드라마는 한 명만 걸리면 본 사람 전체를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비밀이 없고 언젠가는 잡힌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둑질은 용서되더라도 한국드라마 본 것은 용서받지 못한다는 경고였습니다.


그럼에도,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의 20대는 반항기였습니다. 그래서 청개구리처럼 하지 말라는 짓은 더 열심히 했습니다.


덕분에 모든 금지와 위험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가 살던 우물을 벗어나기 위해 꿈틀거렸습니다. 20대에 맛본 한국드라마는 저에게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며 자유로운 꿈을 키워 주었습니다.



금지는 도전을 부르고, 도전은 우리를 성숙하게 만든다.
- 윌리엄 아서 워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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