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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개도리 Jan 04. 2024

난생처음 실제로 만난 '남조선 괴뢰'

- 한반도의 평화를 열망하며 -

한반도, 그 어딘가에 남한과 북한이라는 두 나라가 존재합니다. 

오천 년의 역사와 한민족이라고 부르는 이 땅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로 나뉘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새로운 세상에서 허둥지둥 적응하던 서울생활 2개월 차,

저는 대학생들과 함께한 통일체험캠프에서 '남조선 괴뢰'를 처음 만나게 됩니다. 





서울에서 느낀 절해고도의 낯선 외로움 


저는 처음 대한민국에서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이 자유가 너무 낯설어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헤맸습니다. 모든 것이 저 혼자 스스로 해야 되었습니다. 30살이지만, 대한민국에서 저는 아자아장 걸음마를 떼는 아기나 다름없었습니다. 북한의 사상교육으로 "썩고 병든 세상"이나 보도를 통해 시위하는 모습 그리고 남한 드라마에서 본 것이 제가 아는 대한민국의 전부입니다. 북한에서 제3국을 거쳐 바로 오다 보니(직행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삶에 대해 백지상태였습니다. 하나원 3개월간 적응 교육을 받지만, 그 기간에 배운 지식은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새로운 자유를 얻었지만, 거의 1년은 서울의 거리를 걷다가 문득문득 절해고도의 외로움에 쌓여 먼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곤 하였습니다. 저의 귀에 들리는 낯선 음악들, 수많은 자동차 소음, 높이 솟아있는 아파트들도 자기들만의 무리를 지어 소통하며 저를 외면하는듯하였습니다. 저를 더욱 외롭게 한 것은 서울의 그 많은 사람 중에 제가 알고 있는 얼굴이 단 한 명도 없는 것을 깨달을 때입니다. 


고향에서는 걸음걸음 아는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때로는 동창, 때로는 소꿉친구, 때로는 직장동료, 때로는 엄마친구, 때로는 친구의 부모, 때로는 학창 시절 선생님, 때로는 친구의 친구, 때로는 친척, 때로는 사촌, 북한에서의 인맥은 끝이 없습니다. 


고향에서도 그랬지만, 대한민국에 와서도 제가 힘들 땐 항상 노래가 함께 있었습니다. 저는 30년 그 사회에 성장하다 보니 친근하게 다가오는 북한 노래를 많이 불렀습니다. 당연히 저 혼자 마음속으로, 또는 흥얼흥얼 아무도 모르게 불렀습니다. 저는 지금도 가끔 생각 없이 흥얼거리는 노랫소리에 깜짝 놀랍니다. 이젠 10년이 넘어가고 있는데 저의 입에서는 아직도 북한노래가 흘러나옵니다. 


그 당시 여기서 믿을만한 존재는 오직 고향에서 틈만 나면 웨치 던 '자력갱생' 저 자신뿐이었습니다. 북한에서 교육받은 '자력갱생' 정신이 이렇게 힘이 되어 제 생에 도움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었습니다. 


대한민국에는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단체들과 따뜻한 마음들이 존재합니다. 하나원(북한이탈주민은 국정원 3개월 조사기간, 하나원 3개월 교육기간, 6개월간 외부와 차단된 단체생활을 합니다.)에 있을 때 어느 교회에서 단체로 북향민들을 만나려고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 권사님이 저에게 다가와 잘 왔다고, 고생했다고 따뜻이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내면에는 두려움이 존재했습니다. 


'이 사람은 나한테 뭘 바라서 이렇게 다정한 척 하지?' 


저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의 무의식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북한에서 교육받은 "혁명적 경각성"이 촉각을 세웁니다. 북한에서 영화로 본 '승냥이' 희미한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미국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겉으로는 불쌍한 사람들을 돌봐주는 척하지만 내면에는 악이 존재했기에 사람들을 음모하고 이용하는 내용입니다. 또한 북한에서 기독교는 '우리의 사회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는 자들'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탈북자들을 살뜰히 챙기다가 돈으로 매수해서 다시 북한으로 파견한다는 주입식 교육을 받는다던 생각도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가오는 사람은 의심하고 의심하며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방어기제작동으로 인해 저에게 낯선 외로움의 날들이 더욱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통일체험 캠프에서 한반도 평화를 열망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며 2개월 차 되던 어느 날, 

저는 북향민들 적응을 위해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적십자 여사님의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여사님은 연세가 있으신 분인데, 제가 하나원을 나와 처음 서울에 거주할 때 휴대폰 개통, 동사무소 일보는 법 등을 도와주신 분입니다. 서울 생활이 백지상태에서 조금 벗어나 대중교통 이용, 은행이용 등 실 생활에 한 걸음씩 적응하고 있느라 정신없는 저에게 여사님은 통일체험 캠프가 진행되며 책임자분에게 전화했다고, 꼭 참여하면 좋겠다고 적극 추천해 주셨습니다. 낯선 사람들과 단체생활을 한다는 것은 저에게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낯선 세상에서 적십자 여사님의 적극적인 추천에 힘 얻어 저는 성신여대, 한성대, 국민대, 고려대 등 새터민 대학생들과 함께 2박 3일 '열쇠부대' 체험에 참여하였습니다. 


북한에서 고등중학교 5학년, 16살이 되면 '청년근위대' 훈련을 하며 여기서 첫 실탄사격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생활전선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다 보니 '청년근위대'훈련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실탄사격은 대한민국에 와서 처음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통일체험캠프에서 장갑차를 타고 실탄사격을 하다가 갑자기 북한에서 군사복무를 하고 있는 오빠가 떠올랐습니다. 


만약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나는 누구의 편을 들것인가?

나는 누구이며 여기는 어디인가?

과연 나는 대한민국 국민인가? 

나는 누구에게 이 총구를 겨눌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 저의 마음은 멍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통일캠프 체험에는 북한에서 '남조선 괴뢰'라고, 그렇게 적개심으로 부르짖던 그 '괴뢰'가 눈앞에 있었습니다. 북한의 보도에 나오는 방송원(북한식 표현)은 강렬하고 거친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저는 '남조선괴뢰도당들은 우리와 한 하늘을 이고 같이 살 수 없는 원쑤(북한식 표현)'라는 표현을 밥 먹듯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렇게 30년을 성장한 저의 상상 속에는 '남조선 괴뢰'는 당연히 험악한 얼굴과 '바보'같은 모습으로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제가 알고 있는, 제 상상 속의 '괴뢰'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우리 오빠, 우리 동생 같은 평범하고 순수한, 어디에나 만날 수 있는 이웃입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 이런 아들을, 형제를, 친구를 잃는다면... 그리고 고향의 우리 오빠와 나는 총구를 마주해야 되는 것인가? 제가 오빠를, 오빠가 저를... 형제가, 가족이, 친구가 서로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갑자기 너무나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절대, 절대 다시는 한반도에 전쟁이 터지면 안 됩니다. 


북한에서 본 영화 '민족과 운명_어제오늘 그리고 내일'의 한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6.25 전쟁시기 아버지가 마을을 점령한 미국 놈들이(북한식 표현) 조직한 '치안대'에 가담해 '치안대' 완장을 차고 고향사람들 중에서 '빨갱이'를 찾아내어 죽입니다. 물론 친하게 지내던 이웃도 예외는 아닙니다.

한편, 인민군대에 나간 아들이 이 소식이 믿기지 않고, 아빠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고향에 찾아옵니다. 결국 아빠와 총구를 겨누고 끝내 아들은 아빠를 죽입니다. 비극 중에 비극입니다. 그리고 아들은 스스로 '민족반역자'의 씨를 말려야 한다고 결심하며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 평생 혼자 살기로 한 그는 함께 싸우다 숨진 친우의 딸을 찾아 입양하고 혼자서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친딸처럼 사랑을 다해 키웁니다. 

그 딸이 성장해서 결혼하려고 할 때, 남자친구의 엄마 즉 시어머니가 그 딸의 아버지와 함께 고향에서 살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시어머니로 하여 아버지의 과거가 밝혀지며 그 딸의 결혼에 걸림돌이 됩니다. 친아빠로 알고 자라온 그 딸은 아빠의 과거를 알고 너무 슬퍼하며, 아빠는 '민족반역자'가 아니라고 믿으며 아빠의 무죄를 하나하나 밝히려 합니다. 당에서 또한 아빠의 헌신과 노력을 인정해 반역자의 굴레를 벗겨주는 감동적인 내용입니다. 당연히 북한의 정치사상적 환경과 배경을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그럼에도 아빠와 아들이 총을 겨눈 그 장면에서 저는 얼마나 울면서 슬퍼했는지 모릅니다. 한반도의 비극은 저의 마음을 진심으로 아프게 했습니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지난 이야기가 아닌, 앞으로 한반도에 평화가 존재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우리의 미래에 다가올,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반드시 한반도의 비극이 되풀이되서는 안됩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곧 너무나 소중한 우리 형제, 우리, 부모, 우리 친구 그리고 우리의 일상입니다. 


실탄사격 중에 떠올린 사랑하는 오빠의 얼굴은 저에게 한반도 전쟁의 비극을 상상하게 느낄 수 있도록 현실적으로 떠올려 주었습니다. 그 순간, 전쟁은 먼 나라의 이야기나, 통계의 숫자가 아닌 우리 가족, 우리 이웃, 우리 친구들로 다가왔습니다. 이렇게 대학생이 아니면서 대학생들과 함께한 통일체험캠프는 저에게 한반도 평화의 필요성과 소중함을 열망하게 하였습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한반도에 존재하는 상극의 두 정치체제와 이기주의 적인 선입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에게 평화는 깃들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떠나, 모든 사람들이 저와 같은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북한이나, 남한이나 현재 정치는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에 바쁩니다. 


통일체험 캠프에서 만난 대학생들과의 소중한 경험은 저에게 서로 배려하고 공감하며,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평화의 중요성을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당당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헌신할 것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우리 모두의 간절한 바람이며 소망입니다.  


'한반도의 서로 다른 모습'


북한과 대한민국은 서로 다른 모습임에도 함께 더불어살아가야 될 운명이며 한반도에 살고 있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저는 남북한의 서로 다른 그 모습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미래를 그려보며 저의 작은 평화의 열망이 한반도의 큰 평화를 불러오길 바랍니다. 





 평화는 단지 휴전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 첸나이 간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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