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개도리 Feb 29. 2024

대를 잇는 이산가족의 아픔

- 한반도의 이산가족, 그 아픔의 연대 -


우리 집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내가 현재 이산의 아픔음을 겪고 있다. 가족과 헤어지는 아픔은 어떠한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한반도가 둘로 갈라져 있는 한, 한반도에 평화가 존재하지 않는 한, 이산가족의 아픔은 나에게만 극한 된 것이 아니다. 이 아픔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며 힘을 모아야만 극복할 수 있는 공통된 고통이자 도전이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는 언젠가 평화의 역사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 아픔을 공유하며 한반도의 평화가 피어나기를 소망한다. 






먼 옛날,


아버지의 공민증을 보며 어린 마음에 떠오른 궁금증은 아버지의 고향인 '개성시 판문군 덕수리'였습니다. 어떻게 개성에서 함경도까지 이주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저를 강하게 이끌었습니다. 


개성에서 함경도는 한국의 강원도에서 전라도만큼 먼 거리입니다. 북한의 끝에서 끝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동의 자유가 제한된 북한에서 이런 이동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기에 어린 저의 마음에 궁금중이 생겼던 것입니다.


제가 살던 고향에는  삼촌, 이모, 사촌, 큰아버지, 큰어머니 등 아버지의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친척 중 한 명에게서 우연히 아버지가 개성에서 함경도로 이주하게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개성에는 역사 유물을 비롯한 골동품이 많습니다. 당시 북한 당국에서 놋그릇, 놋수저를 바치도록 하였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친척 중 노할아버지 한 분께서 이를 거부하며 반항하였다고 합니다. 


결과 주변의 친척들과 가족들이 전부 함경도로 이주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아버지 가족사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가족은 <월남자 가족>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형제 4명은 북한에 남았고, 나머지 4명과 할머니는 남조선에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1990년대까지 큰아버지(아버지의 형)와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월남자 가족>이 겪은 아픔은 가족과의 이별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아버지는 토대가 좋지 않아 군대에도 입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열심히 일하며 '조선노동당원'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월남자 가족의 오명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표현하지 못한 아픔을 마음에 숨기고 살았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자신들의 가족사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식들에게 자신이 겪고 있는 아픔과 <월남자 가족>의 그림자를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가 겪었을 가족과의 이별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저에게 뼈 아프게 다가옵니다. 그나마 저는 다 큰 성인이 되어 제가 선택한 아픔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린 시절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졌고, 그 이유는 지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 우리 아버지의 형제들은 살고 있지만 찾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없기에 저는 그들의 이름조차 모릅니다. 


이산가족의 아픔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기를, 저의 대에서는 끊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고향에 가족이 살고 있기에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제 더 이상 아픔을 멈출 수 없기에 조금의 용기를 내어봅니다. 


이산가족의 아픔은 언제인가 꼭 다시 만날 어머니를 끝없이 기다리는, 손꼽아 기다리는 기다림입니다. 그 기다림은 저에게 한반도 통일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게 하고 그 길에 더 큰 힘을 실어 줍니다. 


이산가족의 아픔은 서로 공감하는 과정에 공존과 이해의 다리를 놓아주어야 할 한반도에 공존하는 모든 이들의 숙제이기도 합니다. 




이산가족의 아픔은 곧 통일의 기다림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이상한 여자'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