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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Nov 13. 2022

펜이 칼보다 강해?

김훈과 조세희

 글 스타일이 짧은 호흡의 글을 좋아하는 요즘 독서가들과 맞지도 않고 분량도 길어 <아직도 굴뚝 위의 난장이는 많다>를 많이, 끝까지 읽을 거라는 기대는 별로 안 했다.

그저 저렇게 열심히 읽고 기록하던 때도 있었다는 회고 겸 정리 차원에서 올렸다. 그런데 워낙 책 자체가 오랜 시간 읽히고 사랑받은 스테디셀러, 명저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읽는 것 같다.

거기 힘입어 원래 앞 포스팅 전에 먼저 썼던 리뷰도 옮겨본다. <아직도 굴뚝 위의 난장이는 많다>보다는 글 길이도 짧고 읽기도 더 편하지 싶다.


2016년에 재독 하면서 문체, 작품과 연결되는 내외적인 얘기와 연결해서 몇 개의 리뷰를 썼는데 그중 김훈과 문체, 스타일 비교를 해 본 것이다. 

나는 문학 전공자는커녕 고등학교도 간신히 나와 골방에서 혼자 읽은 단견이니 부족한 점이 있어도 짧은 독서의 개인적인 감상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 조세희와 김훈 


1. 펜과 칼 


" 칼이 펜보다 강한 거야. 세상에 어떻게 펜이 칼보다 강할 수 있어? 칼 쥔 놈들은 칼이 강하다고 말 안 해. 왜냐하면 본래 강하니까.”


김훈은 어느 인터뷰에서 저렇게 말했고 나쁜 말은 아니로되 민망한 말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언어가 이 세계를 개조하는 데 유용한 수단인 것은 인정했지만 회의했다. 서로가 상대가 가진 힘을 속으로 동경하는 속성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러니 누가 더 강하고말고를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칼 쓰는 무인과 글 쓰는 문인은 칼과 펜이라는 각자의 무기를 휘두르면서 서로가 상대적 우월성과 컴플렉스를 같이 지니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됐다.


조세희는 김훈과 아주 다르게 이야기했다.

"인간의 기본권이 말살된 '칼'의 시간에 작은 '펜'으로 작은 노트에 글을 써나가며..... 말이 아닌 '비언어'로 우리를 괴롭히고 모독하는 철저한 제 삼 세계형 파괴자들을 '언어'로 상대하겠다는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아 며칠 밤을 세우고도 제대로 된 문장 하나 못 써 절망에 빠졌던 것도 바로 나였다."

​조세희와 김훈의 '칼'과 '글'에 대한 생각은 저렇게 다르다. 김훈의 글에 대한 불신, 회의성은 약육강식과 강자 생존의 이치를 인정해야 하며 그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라는 삶의 태도로 여겨진다. '옳다'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다'라는 것인데 김훈의 모든 글은 그 '어쩔 수 없음'에 관한 중년 한국 남자의 허무하고 고독한 독백이다. 김훈은 어쩔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놔두고 어쩔 수 없는 삶을 열심히 살뿐이며 모든 고통과 죽음은 아주 '개별적'이라고 내내 썼다.

한 때는 자본주의의 부속물로 살아가는 자괴감으로 저런 말에 깊은 공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어느 날부터인가는 '뭐 어쩌랴! 오늘도 숟가락 들고 열심히 밥을 벌 수밖에!라는 밥통 우선주의, 한국 남성 가부장들의 자조와 자부를 대변하는 듯한 어조가 피로하고 식상해졌다.

'밥이 다다. 밥이 최고다'라는 '밥통 우선주의'가 같은 산업 현장에서 근무 중 사망 사고가 재발하는 것 같은 위법, 편법에 일조한 것은 아닐까?


'나는 써야되는 이야기 말고 내가 쓸 수 있는 이야기만 쓰겠다'라는 김훈의 얘기는 솔직하기도 하고 창작가에게 뭐를 쓰라 마라 할 수는 없지만, 이제 막 글을 쓰기 시작한 신인이 아니고 김훈 정도 되면 개인적 허무에 대한 재생 말고 이제는 어떤 사회적 고민도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조세희는 어쩔 수 없는 것을 애써 말하려 했고 개별적인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나의 문제, 우리의 문제로 환원시키려 애썼다.

​내 머리는 김훈의 현실에 동조하지만 가슴으론 조세희의 이상에 진동, 공명한다.

김훈은 세상을 이성적으로 정확하게 봤지만 정확한 게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조세희는 '옳은 것'에 대한 말을 하고 싶어 했고 강산이  번 변한 세월 동안 난.쏘.공이 오래 살아남아 읽히는 것도 그 '옳은 것'에 대한 동조자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아직도 여전히 '옳은' 세상은 오지 않았다는 슬픈 반증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소설이 계속 팔리는 게 슬프다고 했다.



2.문체의 재발견- 김훈 이전에 조세희가 있었다.


김훈의 글을 읽으며 계속 '어! 이 문체, 이 문장의 느낌.... 어디서 봤더라?....' 했다. 이 짧고 따-악. 따-악 끊어지는 스타카토식 문체, 한 문장 안에서 같은 말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스타일.... 어디서 봤더라...' 했는데, '조세희' 였다.

두 작가는 끊어치는 단문과 사실주의적 글쓰기가 비슷하지만 글의 묘사나 표현 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차는 상당히 다르다.

김훈은 기사체, 건조체로 사실주의적 글을 쓰고  조세희는 선명한 대조와 환상주의적 묘사, 동화적 분위기로 오히려 극 사실주의적 효과를 낸다.

김훈이 일기, 에세이, 독백체 문체라면 조세희는 시나리오, 대화체 문체다.

김훈이 밥벌이의 책임감에 절은 중년 남자의 고독한 내면 독백체라면 조세희는 밥을 퍼 주는 어머니, 항상 배고픈 아이, 꺾이기 쉬운 소녀의 대화체다.


김훈이 마치 자기 내면의 이야기 같은  '나'의 시점이라면 조세희는 나, 너, 그, 우리...로 시점과 공간을 넘나 든다.

김훈에게선 한 사람(한 남자)의 목소리만 들리고, 조세희는 여러 사람의 얘기가 같이 들린다.

김훈은 과거의 역사도 지금의, 오늘의 이야기처럼 말하고 조세희는 지금 이야기를 하다가도 갑자기 과거로 건너뛴다.


김훈은 '지문'에 능하고 조세희는 '대화'에 능하다.

김훈은 1인 남자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극에 잘 맞고 조세희는 독특한 상황과 여러 인물의 캐릭터, 대화를 잘 살린 단막극과 연극에 더 맞다.

김훈은 신문기사를 스크랩화하는데 능하고, 조세희는 문자를 영상화시키는데 뛰어나다.

조세희의 난장이 연작을 읽으면서 김운경의 드라마들이 생각났다.

<파랑새는 있다><서울의 거리><유나의 거리>.... 는 조세희 연작들처럼 등장인물 모두가 3류 주인공이며 개별적 존재가 아닌 못난이들의 끈끈한 연대를 보인다.


어릴 땐 당시 소설 속에선 볼 수 없었던 환상적이고 상징적인 이미지들에 대한 인상과 강렬한 메시지에 혹해서 문체나 문장이 기억에 남진 않았다. 소재나 주제가 문체를 압도한 것이다. 이게 조세희와 김훈의 차이라는 걸 이번에 새로 깨달았다. 김훈은 그의 문체가 주제를 넘어서지 못하고, 조세희는 주제를 위해 문체를 수단으로 사용했다.

김훈은 어떤 매체의 '추천 도서'목록에 조세희의 난.쏘.공을 얹기도 했었다. 근간 몇 년(아마도 세월호 이후인 듯)의 김훈의 발언을 보면 작가, 어른으로서의 책무감을 느낀 듯한 변모가 보인다.


3. 기법의 재발견


재독 하면서 1970년대 작품이라고 보기엔 믿기 힘들 만큼 현대적인 느낌과 1990년대에 대한민국 문단의 주류 트렌드였던 포스트모던한 기법들이 보여서 놀랐다.

난.쏘.공은 꿈과 현실, 상상의 세계가 혼재되고 한 이야기, 한 대화 속에서 현재와 과거가 넘나 든다. 우주적이고 초월적 분위기를 그리다가 어느 순간은 신문 기사를 읽는 듯한 정밀한 묘사를 한다.

가상의 도시 '은강'의 묘사는 모 도시의 문서·통계를 대입하고, 난장이 집의 생활을 드러내는 데는 철거 계고장, 가계부 같은 도식을 지면 전면에 등장시켜 어떤 세밀한 묘사보다 효과를 극대화한다.

한 페이지 전체를 두, 세 인물 간의 아주 짧은 대사로만 채워서 연극, 영화의 시나리오적 효과를 내기도 하고 시와 산문적 정서를 오가는 혼성 기법 등은 훗날 세기말 전후의 탈장르, 해체주의적 기법의 효시 같다.

(각각 당대의 포스트모던한 대표 작가로 불렸던 장정일, 박민규가 이런 기법을 즐겨 썼다.)


한때 운동권 교육 교본으로 정해졌을 만큼 상당히 시대 비판적인 글이 <창. 비>가 아닌 <문. 지>에서 처음 나온 것도 아마 그런 형식적 실험성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훗날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28번>에 넣기도 했지만 난장이 연작이 처음 발표됐을 당시 문.지의 우호적 비평과 달리 창비(백낙청) 측은 상당히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황석영의 <객지> 스타일을 선호한 창비는 난.쏘.공에 대해서 모호한 환상성에 노동의 구체성이 없다 등으로 혹평했다.


창비는 훗날 신경숙의 <외딴방>을 조세희의 난.쏘.공이나 홍명희의 임꺽정, 염상섭의 삼대와도 비교가 안된다는 식으로 상찬 했다. 개인적으로 신경숙의 표절 논란이 일기 전에 그녀의 작품 중에선 유일하게 호감 있게 읽은 글이지만 과유불급의 칭찬이라 생각한다. 요즘도 노동, 노동자가 소재로 된 소설에 '제2의 조세희'나 '조세희를 능가하는'이란 수식어를 종종 보는데 우화적이고 환상적 기법으로 쓴 글에 '제2의 카프카'라는 극찬을 볼 때의 마음이 든다.


창비의 비평은 '사실주의'를 너무 협소하고 이론적 측면에서만 본 것 같다. 때로 반어가 어떤 흑백논리보다 더 정확한 진실, 혹은 사실을 드러내듯이 나는 오히려 조세희의 환상, 몽상성 속에서 어떤 신문 기사보다 선명한 구체성을 느꼈다. 카프카 또한 누구보다 환상적, 우화적 기법을 많이 썼지만 누구보다 더 사실적이었던 것처럼-

다시 읽으며 굴뚝 위에서 쇠공을 돌리다 추락사한 난장이 아버지에게서 포크레인 농성을 하던(하는) 수많은 한진, 쌍용 등의 노동자들이 연상됐다.


지금은 이렇게 열정적으로 읽을 기력도 없고 이 정도 애정이 가는 책이나 작가도 잘 못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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