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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Mar 22. 2024

일상의 <괴물>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괴물>,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일상 속 괴물     



상처는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 자주, 오래 본 사이에서 더 많이 생긴다. 사람들이 집, 학교, 직장에서 상처를 주로, 많이 받는 배경이기도 하다. 조금 냉소적으로 얘기하면 세 곳에서 다 상처를 받지만 집에선 의식주를, 직장에선 돈을 받으며 상처를 받는데 학교는 가장 많은 돈을 쓰면서 상처를 받는다는 차이가 있다.

대게의 상처는 차별과 편견에서 생긴다. 특정 삶의 양식을 ‘정상성’으로 규정해서 그 자의적 기준에 따라 타인을 쉽게 판단하고 편 갈라 원 밖으로 몰아내는 사고와 행위다.


한국 사회에서의 ‘정상성’이란 무엇인가. 대학교 교육을 마친 성인 남녀가 결혼 적령기에 이성애자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집을 사고 차를 사서 이혼도 사별도 없이 ‘대체로 남들 사는 대로’ 계속 유지하는 삶이다. 그런 부모의 자녀라야 학교 안에서 ‘정상적인 학생’으로 인정받기 쉽다. ‘정상성’을 ‘다수의 삶’ ‘남 가진 걸 나도, 내 자식도 가진’ 것으로 정의하는 것 같다.

    

학교는 미성년자들의 사회다. 내가 성인이 되기 전, 집 밖에서 가장 많은 상처를 받은 대상은 학교, 선생이었다. 학생들을 ‘정상적’ 사회인으로 기르기 위해 존재하는 학교에서 나, 우리 가족의 비정상성을 자주 느끼곤 했다. 설문지가 아닌 취조지 같던 ‘가정환경조사서’의 ‘없음’에 체크 할 게 더 많고 이혼이나 사망으로 한쪽 부모만 있는 아이는 정상성 범주에서 벗어난다. 그들은 차별이나 동정의 대상이 되기 쉽다. 나는 둘 다 싫어 조용하지만 무표정한 얼굴과 반항적인 어투를 방패막이로 삼았다.

고라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의 요리는 나와는 반대로 해맑게 웃으며 폭력과 차별을 수용한다. ‘온몸의 힘을 빼고 포기한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 위해.’     



선생과 부모는 학생, 자식을 무난하고 순종적인 정상인으로 키우고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답게’를 요구한다. 그런 -답게와 정상성을 이 영화에서는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가족’ ‘소수가 아닌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일’이라고도 한다. 영화 속에서 선생과 부모들은 ‘남자답게’를 계속 얘기하고 ‘남자는 꽃 이름을 몰라야 여자한테 인기가 있다’라는 편견을 주입한다. 부모들 역시 ‘아버지처럼’ ‘남자답게’를 되뇌고 ‘흰 원 밖으로 떨어져 나가면 지옥이다’라며 원 안을 벗어나지 말 것을 주의시킨다. 남자애들보다 여자 동급생이 더 편하고 친해서 왕따 당하는 자식에게 ‘너는 돼지의 뇌를 가져서 그렇다’라며 공포와 죄책감을 조장해 남과 다른 나는 ‘괴물’이란 자책에 빠지게 한다.      


대게의 답게는 을에게 주로 요구되지만 갑이라고 완전 자유롭지는 않다. 살면서 우리는 ‘선생답게, 부모답게, 장녀/장남답게, 직장인답게……. 라는 유무형의 언질과 눈빛에 끊임없이 속박되지 않는가. -답게는 평온한 조직과 사회를 위해 나다움을 갈아 없애 평균, 다수 맞춤형으로 만들기 위한 주문, 세뇌다. 정해진 남답게로 사느라 나답게는 줄어들다 없어진다. 간혹 나답기를 힘들게 지키는 이들은 이 사회의 아웃사이더를 감내하거나 죽어야 한다. 영화 속에서 어른들은 정상성, 다수성에 한 치의 의문 없이 그것을 자식과 학생들에게 답습시킬 때, 아이들은 계속 묻고 고민한다.

“돼지 뇌를 이식한 인간은 돼지일까, 인간일까?”, “남과 다른 나는 괴물인가?”   



고라에다 히로까즈의 다른 영화처럼 <괴물>에도 특별하고 극적인 악인은 없다. 어느 부분은 선하고 어느 부분은 위선적이고 폭력적이다. 일상 속 우리가 그렇지 않나. 사람들은 드라마틱하고 특별한 거대악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일상적 소악에는 무감하고 대응하기도 힘들다. 그 속에는 '너를 위해서'라는 호의, 관심, 대항하기 힘든 위계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 속 괴물로 무능하고 위선적인 교장, 언어 신체적 학대를 일삼는 요리의 아버지를 꼽는 건 너무 쉽고 납작한 해석인 이유다. 영화에서 미나토를  억압하는 사람은 요리의 아버지도, 교장도 아니다. 미나토를 가장 생각하고 사랑하는 엄마, 학생들한테 관심이 있는 담임 호리다. 그들은 미나토에게 ‘남자답게’와 ‘아빠처럼 (이성애자와) 결혼해서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가정을 이루라’ 는 다수의 정상성을 계속 주입 시키고 다른 말과 생각, 가능성을 묶는다.   

     


진실은 단면이 아니라 입체     


<아이가 머리카락을 스스로 잘랐다. 얼굴에 상처가 있다. 운동화 한 짝만 신고 왔다. 보온병 안에 흙과 돌이 들어있다. 방에 토치와 칼이 있다. 고양이를 화장했다…>


영화는 이런 상황을 세 사람의 시선으로 각각 보여준다. 한 공간의 어떤 순간, 각자가 대면한 특정 장면은 같지만 그 전후 사정에 따라 진실은 판이하다. 영화는 관객에게 완고한 진실을 주장하지 않는다. 미세한 ‘차이의 반복’ 혹은 ‘반복의 차이’를 통해 관객이 진실의 과정을 따라가게 한다.

하나의 진실, 일관된 진실, 객관적인 진실은 없다. 진실은 완성된 퍼즐처럼 완벽하지 않고 조각조각 떨어져 있다. 하나의 평면적인 보자기가 아닌, 개개의 조각이 모여 하나의 완성체가 된 콜라주, 조각보다. 그리고 밝히고자 한 진실에 대면, 직면했을 때 내 속의 괴물을 자문하고 대면하게 한다. 또,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이해하고 싶어진다.     

다면, 다층적 진실을 보여주는 영화의 구성은 감독의 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 나오는 ‘다큐멘터리’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다큐멘터리라는 것은 면이 아닌 입체로 파악하는 것이고 다양한 해석 가운데 한 가지 해석을 자기 나름대로 제시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객관적이라는 잘못된 고정관념에 맞서는 데도 유효할 것이다.


‘다큐멘터리’에 ‘진실’을 대입해도 무방하다. 진실에 대한 감독의 시선은 감독이 자기가 만들고 싶은 영화는 (충실한) ‘재현이 아닌 생성’이라는 말과도 맞닿아 있다.     




소수성의 우정과 연대     


그가 보이고 싶은 생성은 ‘제 발밑에 연결된 어두운 부분을 주시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만남을 소중히 여겨 외부와 마중하고 그 좋은 점을 영화 속에서 표현하는’ 것이다. ‘어두운 부분’과 ‘새로운 만남’은 그의 전작들에서도 공통된 주제다.

<괴물>에서도 미나토와 요리의 우정, 혹은 사랑을 통해 그런 그늘과 새로운 만남을 통한 성장과 연대를 보여준다. 자신의 정체성을 일찍 깨닫고 인정한 요리와 달리 늦게 인식한 미나토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혼란스러워한다. 한 명은 인정해서 외롭고 한 명은 인정하기 싫어서 외롭다. 그 외로움은 부모와 선생들의 “남자답게” “아버지처럼”이란 구호 때문에 더 가중 된다. 외로움의 공허 속에서 외부의 편견과 차별을 뚫고서 마침내 서로 손을 잡는다.


공허는 타자와 만나는 장소에 펼쳐져 있다, 공허는 가능성이다. 자신이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은 곧 타자와 연결된 가능성이다.

 

한쪽 부모만 있는 아이들의 외로움과 왕따, 학교의 무능, 소수성의 우정과 사랑, 있던 곳으로부터의 탈출이 ‘기차’라는 매개, 실지인지 환상인지 바램인지 애매한 결말의 코드는 흡혈귀와 인간의 불가능한 우정과 사랑을 담은 <렛미인>을 연상시켰다. 렛미인은 눈 시린 겨울 영화, 괴물은 태풍이 몰아치는 여름 영화다. 그러고 보니 고라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중 ‘겨울’이 배경인 것은 없었던 것 같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궁금하다.


두 소년이 억압적인 답게를 강요하는 집과 학교를 벗어나 숨어든 자기들만의 아지트는 숲속에 버려진 폐기차인데 그 숲 입구에 미나토는 (여기) “나 있어”라는 팻말을 걸어놓는다. ‘이 안에 사람 있으니 함부로 들어오지 마세요’와 ‘우리 여기 있으니 구해 주세요.’라는 이중 구조로 쓰인다. 렛미인(Let Me in)에서 “날 초대해 줘. 난 초대해야만 들어갈 수 있어(들어가도 되니? 들어가게 해 줘)”로 쓰였는데, 둘 다 ‘함부로 침범하지 않겠다, 그러나 나를 봐 줘’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학교


영화에서 주인공 학생 둘과 진실의 다면성을 입체적으로 그린 것과 비교해 학교, 선생들의 모습은 평면적이다. 학교라는 그릇 안에 담긴 아이들은 각기 다른 개성과 성격, 환경으로 끓기  전의 용광로 같지만, 아이들을 담은 그릇인 학교와 선생들은 평면적이고 단순한 현실의 반영 아닐까. 한쪽을 극단적으로 비하하거나 악마화하는 것을 경계하는 감독의 정서상 학교 내 폭력과 선생들의 무능을 선정적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가해자가 피해자이기도 한 영화 속 상황은 최근의, 웹툰 작가와 선생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이 연상되기도 했다.

“애들보다 학부모 대하는 게 더 어려운 시대”라는 토로, “교육 위원회에 알려지면 학교가 처분 대상”이라며 사건을 은폐, 축소, 미봉하는 장면들은 학부모와 교육청 사이에 끼어 눈치 보기 급급한 한국의 현 교육 현장과도 같은 상황이라 씁쓸하다.      


고백하는 악기-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가장 기억에 남는 음악, 소리는 교장과 미나토가 부는 금관 악기다. 이 소리는 영화에서 두 번 들리는데 각기 다른 사람이 ‘진실을 요구하러’ 오는 장면에 나온다. 엄마와 담임 선생 두 사람의 시점에서는 큰 괴음처럼 들리다가 미나토의 시점 후반부에서야 이 괴음의 실체가 드러난다. 진실을 고백하는 도구로. 두 사람이 각자의 진실을 이 악기 속에 뿜어낸다.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대숲에 소리치는 것처럼. 대숲이 진실을 듣는 귀라면 영화에선 금관 악기가 그 역할을 한다. 악기 모양도 큰 입 같고 귀 같다. 앞서 엄마와 담임 두 사람의 시점에서 정체를 알 수 없어 괴음 같던 소리는 미나토 시점에선 뱃고동 소리 같고 기차 경적 같다. 뿌우 뿌우~ 크고 무섭고 슬프다. 진실은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무섭고 슬픈 일 아니겠나. 뱃고동, 기차 경적은 ‘출발’의 수신호이기도 하다. 소년 미나토는 자기 진실을 인정하고 한발짝 나가는 것으로 영화가 끝나는데 교장의 진실은 악기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교장과 미나토는 가장 친해지기 힘든 관계다. 나이, 계급, 각자가 처한 상황 등 모든 면에서 그렇다. 그래서 이 장면이 더 감동적이고 새로웠다. 왜 감독은 무섭고 두려운 진실을 쏟아내는 장면에서 엄마도 담임도 친구 요리도 아닌, 가장 먼 두 사람을 붙였을까? 가깝고 좋아하는 사일수록 진실을 털어놓기 더 힘들어서 그런 거 아닐까. 현실에서도 큰 고민, 수치를 말하기 힘든 대상이 가족이다. 어떤 사건의 결과를 모두가 알고 난 뒤, 가족이 가장 마지막에 알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 아닐까. 오늘 보고 헤어지면 다시 안 볼, 여행지에서 처음 본 사람에게 오히려 편하고 자연스러운 마음을 털어낼 수 있는 그런 것.


고라에다 히로카즈 다른 영화에서도 할머니와 소년 캐스팅과 연기가 특히 좋은데 이 영화도 그랬다. 노인과 아이를 신구세대의 화해 불가능한 적대적 관계가 아닌 성장과 변화의 요소로 삼는 것도 좋다.

‘시대와 함께 갱신되어야 하는 방법론을 어떻게 해석하고 재구축해 나갈 것이냐’에 대한 고민의 구현이리라.     



화장, 재생  


영화 속에서 각자의 시점으로 다르게 묘사되는 장면 중 하나가 고양이 화장, 매장이다. 매장이 관계 확장의 매개가 되는 것은 감독이 영화를 ‘재현이 아닌 재생’으로 해석, 작업하는 면과도 연관 있을 것이고 동양적 사고의 윤회와도 연결돼 보인다. 실지로 영화 자서전에서도 그런 말이 나온다. 그는 서양과 일본이 시간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고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일본인에게는 사계절이 있기에 시간이 순환한다. 서양인들에게는 시간이 직선적으로 흘러간다.’

직선적 사고는 진실의 표현도 단면적이고 재현의 묘사에 우위를 두기 쉽다.

 

감독의 여러 영화에서 주인공과 주변인들은 가까운 대상의 죽음을 함께 맞거나 처리하면서 관계가 확장되는데 <괴물>에서는 고양이의 죽음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묻는 장면은 내가 꼽는 그의 최고작 <아무도 모른다> 속에도 나온다. 부모로부터 방치당한 소년 꼬마 장남이 아사로 죽은 동생을 묻고 오는 장면. 가슴을 미어지게 했던 이 장면 이후로 아이들은 그래도 다시 살아간다.

영화 속에서 애들에게 호의를 보이거나 도와주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비혈연 관계다. 편의점 소년, 재일교포 2세인 왕따. 형제들마저 아버지가 다 다른 반쪽 혈연이다. 흔히 말하는 '정상성' 밖의 가족 구성원이다. 다 채워진 인물들은 없고 한구석 부족해서 소외되고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던 인물들이 만나 친구가 되어 서로를 채워주고 채워진다. 혈연적 가족애가 아니라 연대적 우정이다. 가족, 소수성, 부재, 상실, 약자는 그간 고라에다 히로까즈 영화의 공통 분모였다.     


<괴물>에서 같은 상황을 각자의 시점으로 보여주고 각 등장인물의 감정선에 스며들 듯 천천히 따라가게 하는 구도도 그런 순환과 재생의 영화적 표현일 것이다.

스피디한 두 시간짜리 영화도 길게 느껴져 ‘요약본’으로나 소비하는 시대에 이런 느린 영화가 어떤 사람들에겐 고역일지도 모르겠다. 좋은 얘기도 더 자극적으로, 선정적으로 표현해야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데 그런 장면 하나 없이 학교폭력, 가정폭력, 소수성 같은 무거운 얘기들을 사실적으로, 그러나 쉽고 따뜻하게 그린다.     

내가 좋아하고 좋은 영화, 혹은 좋은 예술로 생각하는 요소 중 하나가 있는데 마침 감독의 영화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 그 말이 나온다. 아직도 이 영화를 보기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책 속의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


영화를 본 사람이 일상으로 돌아갈 때, 그 사람의 일상을 보는 방식이 변하거나 일상을 비평적으로 보는 계기가 되기를 언제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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