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서른의 나라가 기억하는 스물하나의 나라 (2)
이번 회상기행문을 쓰며 2022년을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23년이 되고도 십팔일이나 더 지났다. 아직 회상해야 할 날들이 많은데 기록이 이렇게 느려서 어떡하나 싶지만, 내 속도대로 꾸준히 써나가보려 한다. 원래부터도 글쓰기에 대해서라면 항시 타협의 자세(?)로 임해왔던 것 같지만, 신비로운 숫자 영(0)으로 끝나는 나이이니 만큼, 왠지 더욱 많은 부분에서 관대해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빨간색의 싱가포르(1)
새벽 6시 30분이었다. 지난밤, 첫날의 지출내역서를 작성하며 늦은 새벽에 하루를 마무리한 친구와 나는 같은 방을 쓰는 누군가의 우렁찬 알람소리에 예정보다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꽤 오랫동안 꺼지지 않는 알람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남의 핸드폰을 꺼버려도 괜찮을지에 대해 고심하는 중이었다. 끌까, 말까, 끌까, 말까?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의 핸드폰을 건드려 알람을 끌 경우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사이, 빨간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한 용감한 여성이 침대에서 내려와 알람을 꺼버렸다. 여성은 30분 동안 울린 알람을 단 몇 초 만에 제압해 버렸다. 덕분에 우리 방은 다시 평화를 찾을 수 있었고, 아늑하게 잠에 빠질 수 있었다.
빨간색의 싱가포르(2)
오전 11시가 다 되어 일어나서 식빵 두 장과 오렌지 주스 한 컵을 마시곤 숙소를 나섰다.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온 오차드(ION Orchard)를 구경하다, 갑자기 칠리크랩을 먹기 위해 뉴턴(Newton) 역으로 향했다. 스물한 살의 우리는 무엇보다 먹는 것에 진심이었다. '무엇을 먹느냐'가 곧 '무엇을 보고 느끼느냐'였다.
가는 길이 죄다 공사 중인 철길이었던 탓에 뉴턴 푸드 센터를 찾아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당시 아이엘츠 시험을 준비 중이던 친구가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가는 우리에게 해준 조언이 있었다.
"길을 모를 땐, 무조건 '하우 투 고우 투(How to go to)'만 기억해. 이거 하나면 길 찾기는 장땡이야. 어쨌든 길만 찾으면 살아 돌아오지 않겠냐?"
우리는 열심히 '하우 투 고우 투 뉴턴 푸드 센터'를 외쳤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무지여행 타이틀을 유식여행으로 바꿔야 하나 싶다.
그림뿐인 한 장의 메뉴판을 신중하게 정독했다. 해산물에 뒤집어지는 우리가 칠리크랩을 먹으러 왔다? 머릿수에 곱하기 2로 계산 들어가야 하는 거다. 우린 사인가족이 먹을 양을 시켜두고 둘이서 정답게 나눠먹었다. 칠리크랩, 볶음밥, 새우구이, 번을 주문했다. 이미 가짓수도 머릿수의 두 배이다.
나이 들고 보니 많이 먹는다고 다 소화시키는 것도 아니라서 적당한 양만 먹는 게 맛있게 먹는 방법임을 터득했지만, 스물한 살의 내 위장은 철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스트레스성 장염 빼고는 무서울 게 없는 위장이었다. 우리의 먹성에 감동한 주인아저씨는 크랩과 함께 사진을 찍고 가라며 짐을 챙기는 우리를 불러 세웠다. 뭔가 감사하면서도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는 다시 길을 나섰다.
빨간색의 싱가포르(3)
(다시) 아이온 오차드(ION Orchard)로 넘어갔다. 오늘 저녁엔 나이트 사파리를 가기로 했었다. 아이온 오차드에 홀딱 빠져 구경하던 우리는 나이트 사파리에 가야 할 시간이 되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곳만큼 나이트 사파리를 좋아할 수 있을까? 오밤중에 보는 동물원이 과연 재미있을까? 그렇다고 나이트 사파리를 포기하자니 나이트 사파리에 대한 온라인 여행 후기가 너무 좋았다. 게다가 무엇보다 친구가 매우 가고 싶어 했다. 우리의 어설픈 고민은 쉽게 결론 내려졌다. 나이트 사파리를 보기 위해 앙모키오(Ang Mo Kio) 역에서 138번 버스를 탔다. 이때 싱가포르에서 처음으로 버스를 탔던 것 같은데, 그 느낌이 무척 새로웠다. 버스를 타는 행위 자체에는 익숙한 느낌을 받았지만 동시에 버스 안 공기의 이질감도 함께 느꼈다. 익숙한 행동이 미묘하게 다르게 느껴지는 건 나를 조금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당시의 나는 나이트 사파리를 크게 가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창문 너머로 붉은 주황빛이 보인다. 나이트 사파리가 20주년이 되는 해인가 보다. 20이라는 전광판 앞에서 불안이나 불편은 다 잊어버렸다. 오로지 흥분감만이 존재했다. 내가 왜 나이트 사파리를 보기 싫어했지? 그냥 마냥 좋기만 한걸.
이름에 걸맞게 나이트 사파리 트램은 밤 9시에 출발했다.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운 거리에서 동물들을 볼 수 있었다. 많은 동물들이 철장 없는 자연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듯이 보였다. 트램에 앉아 천천히 동물들을 둘러보며, 우리에게 철장이 보이지 않는다고 정말 저 동물들이 철장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갖았었다. 우리가 탄 트램이 안전한 만큼 그들은 자연스러운 삶을 살아가지 못하겠지, 생각했다.
나이가 서른 인 인간으로 자라나다 보니, 나는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다른 것의 생을 위해 노력하는 다양한 시선들이 있음을 알았다. 고로 나는 여전히 배울 게 많다. 내 인생에서 배움이 끝나는 날이 영영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