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순과 역설에 대하여
우리는 산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생명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에 태어나면서 출발은 했지만 점점 끝이 가까워지고 있다. 그런데 끝이 어딘지 모른다. 그래서 삶은 항상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반대되는 것 같지만 언제나 같이 다니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삶에는 희망이, 죽음에는 두려움이 맞물려 있지만 삶과 죽음이 함께 하기에 희망과 두려움도 함께 한다. 희망은 죽음이 주는 두려움을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믿을 때 생기고 그럴 수 없을 때 두려움에 지배당하고 만다. 두려움에 지배당한 자의 삶은 생존에 가까운 생을 이어가는 비참함으로 치닫거나 죽음으로 생을 끝내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실패를 거듭하고 가족에게는 재난이 찾아오고 자신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사람이 없다고 느낄 때 희망은 사라지고 죽음만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삶은 옅어지고 죽음이 짙어지는 때 우리는 희망보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고 만다. 그럴 때 누군가 손쉬운 방법으로 악으로 유혹하면 쉽게 넘어가고 만다.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면 그 무엇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한다. 여기에서 온갖 범죄가 창궐한다.
하지만 그런 유혹을 뿌리치거나 두려움이 너무 강해 피할 에너지도 없을 때 자살은 이들의 유일한 선택이 된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선택할 때 희망은 이들에게서 이미 오래 전 떠나버린 후이다.
하지만 삶이 언제나 희망을 주는 건 아니다. 삶이 지겨워질 때 희망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가진 게 많고 모든 의학적 조치는 다 취할 수 있는 보장이 있더라도 삶에는 온갖 괴로움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삶과 죽음에 희망과 두려움이라는 이분법적 공식을 대입할 수는 없다.
삶이 선함을 이룰 수 있을 때 희망을 연결시킬 수 있다. 다른 말로, 살면서 가치를 실현할 때 삶은 희망을 품게 된다. 그런데 삶은 언제 가치로워지는가? 원래부터 인간은 가치를 실현하는 목적성을 타고 난다. 하지만 죽음이 주는 두려움으로 인해 삶은 왜곡되고 일그러져 가치 실현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생존에만 몰두하게 되는데 이것이 악이 된다. 그러면 죽음이 없어지면 삶은 회복될 수 있을까? 난 여기에 삶과 죽음이 역설적으로 엮인다고 본다.
그러니까 삶은 그 자체로 본래적 목적을 이루어내기 힘들다. 죽음이 파트너로 존재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렇게 설명해보자.
삶의 제한을 명확하게 알고 이를 받아들인 후에 삶은 남은 생명의 시간 동안 가능한 최대의 가치를 끌어내 빛나는 생을 살아갈 원동력을 만들어낸다. 죽음이 주는 두려움을 삶의 선함과 사랑으로 극복하기 위함이다. 이런 경우도 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삶을 돌려받은 자들은 첫 시간에 모든 만물이 황홀하다고 느낀다. 이전에는 몰랐거나 무시했던 자연이 엄청난 아름다움으로, 다시 말해 그 존재 자체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이럴 때 죽음은 삶의 가치를 만들어낸 원동력이다. 명백한 죽음이 없어도 된다. 죽음이 주는 두려움이 있을 때 그것이 위기가 되고 삶은 더 강하게 에너지를 뿜어내어 희망을 만들어내고 가치있는 삶으로 전환한다.
쉽게 말해 우리에게는 위기가 필요하다. 언제나 희망만이 있을 거라는 기대는 낙관에 불과하다. 낙관이 위기의 순간에 희망을 만들 수도 있지만 낙관에 기댈 때 우리는 나약한 존재가 되어 위기를 극복할 힘을 키우지 못한다. 죽음을 상징하는 위기가 올 때 우리는 낙관이 주는 지겨움과 목적 상실을 깨닫고 삶의 가치로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이것이 삶과 죽음이 갖는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