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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이형 Feb 21. 2016

사랑하며 살기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몇 가지 고찰

나를 사랑하는 것과 타인을 사랑하는 것 중 더 도덕적인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부분의 답은 아마 타인 사랑일 것이다. 왠지 자기 사랑은 이기적인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배고프지만 친구에게 빵을 양보한다든지, 내 돈을 아껴 구호단체에 기부한다든지 등의 행위는 사랑을 실천하는 예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잠시 사랑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사랑이라 생각하는 게 워낙 방대하고 다양해서 무엇이 사랑인지 헷갈릴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우선 사랑은 희생과 다르다. 사랑은 존재로 향하지만 희생은 많은 경우 이득과 관련된다. 내가 희생하기로 마음을 먹을 때 나에게 돌아올 이득을 계산한다. 아무 이득도 돌아오지 않을 때 피해의식만 커질 뿐이다. 자식을 위해 희생한 부모도 나중에 자식에게 자기 희생을 앞세우며 짐을 지우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랑은 그런 희생이 아니다. 사랑은 존재의 충만함로 이어진다. 이는 마치 사랑만이 존재를 온전하게 이루어주는 근원이란 뜻이 된다.


둘째, 사랑은 욕구와 다르다. 욕구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나타내며 우리의 존재적 표현이 될 수는 있지만 그걸 채우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즉,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게 우리 인간이지만 그걸 채운다고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를테면, 내 아이가 배고프다고 밥을 주는 것은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지만 다른 친구의 장난감을 갖고 싶다고 빼앗아 줄 수 없고 경제적 사정에 맞지 않게 그때마다 사줄 수 없다. 그럴 때 아이의 욕구를 채우지 못한 게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긴 어렵다.


이것은 또한 희생과 연관되기도 한다. 내 욕구를 희생하고 타인의 욕구를 들어주기로 했을 때 그건 사랑의 행위라기보다 나에게 돌아올 이득을 계산하는 행위에 가깝다. 물론 내 욕구를 먼저 채우는 이기주의라는 소리를 듣지 않고 배려를 할 줄 아는 친절한 사람이란 꼬리표를 얻는 이득도 포함된다.


그러면 처음에 제기한 타인 사랑과 자기 사랑의 도덕성 여부에 대해 생각해보자. 내 욕구와 타인의 욕구가 충돌할 때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게 과연 더 도덕적인가? 혹시 그 도덕은 나의 명예를 드높이는 건 아닌가? 아니면 단지 나의 희생으로 끝나고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나는 공부하고 싶은데 친구가 놀자고 노는 게 도덕적인가? 나는 친구를 놀리고 싶지 않은데 친구들이 그 아이를 놀리고 싶다면 같이 해야 하는가?


이를 보다 일반화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타인을 위하는 것이 과연 사랑인가?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며 지속적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랑은 이렇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에 갇힌 것인가?


내가 보기에 사랑은 존재의 충만함을 목표로 이루어지는 행위일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앞에서 다룬 사랑은 존재의 문제라기보다는 이익과 손해의 패러다임에서 바라본 것이다. 그러니 둘 중 나보다는 타인을 선택하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둘 다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건 사랑이 되는가? 글쎄, 내가 보기엔 그건 타협이나 협상과 비슷하지 사랑이라 말하기엔 순수함이나 진실함이 좀 떨어져보인다. 사랑은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사랑은 존재의 패러다임 안에서 작동할 때 온전해진다. 쉽게 말해 사랑은 성장과 성숙의 문제이지 이익과 손해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사랑은 자유와 영혼에 대한 문제이지 물질적 풍요로움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뭔가 주거나 받는 문제로 바라보면 다툼이 생긴다. 사랑을 주고 받는 관계에서 따지면 본질은 흐려지고 왜곡되어 서로에게 죄책감과 수치심을 안기는 상처의 근원이 되어버린다.


사랑이 존재의 충만함이라는 본래적 목적을 달성하려면 수용과 지지를 할 수 있는 존중과 믿음이 필요하다. 내 잣대로 상대방을 재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마음 말이다. 판단과 평가는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특정한 꼬리표를 붙이고 값을 매기는 세상에 대한 방어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두려움이 촉발시킨 방어기제이다. 그런 기제는 사랑을 억누른다.


뭐가 이익이 되며 손해는 무엇일까를 따지는 마음도 모두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마음이 아무리 사랑의 행위처럼 자신을 위장해도 본질적으로 사랑을 이루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진실성을 떨어뜨려 거짓과 위선이 활개치게 만든다.


사랑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아는 마음에서 출발한 연민과 같다. 인간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한계와 단점에 대한 연민이다. 완전해지려는 욕구를 가짐으로써 불완전해지는 존재, 사랑을 언제나 갈구하면서도 사랑주기를 두려워하는 존재, 끊임없이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면서 진실은 숨기는 이중적인 존재 등 모순에 빠진 인간의 상태에 대한 연민이다.


그러면서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는 용기이다. 거짓을 멀리하고 가면으로 자기를 포장하기를 거부하는 용기 말이다. 지속적으로 거짓의 달콤함으로 우리를 유혹하여 정직함은 손해이고 거짓이 이익이 된다는 사고를 거부하는 용기를 취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헌신을 기반으로 완성된다. 자기를 온전히 주는 행위 위에 사랑은 완성되고 그 위대함이 드러난다. 헌신은 우리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뒤집는 혁명과도 같다. 뚜렷하지 않은 어정쩡한 삶의 경계로 자신을 규정해온 우리는 헌신적 사랑의 행위에 대해 근본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다. 마치 헌신하면 내가 완전히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이 그것이다. 하지만 헌신이 없다면 사랑은 가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사랑은 오히려 허무주의를 키울 뿐이다.


헌신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자기 희생과 강하게 연관지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희생은 이익을 생각하기에 두려움을 발생시킨다. 헌신은 희생이 아니다. 헌신은 단지 한 곳에 집중하는 마음과 같다. 무언가에 몰두하면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 헌신은 온 존재가 사랑에 휩싸이는 것이다. 단지 감정에 휩싸이는 게 아니다. 감정을 앞세운 어설픈 충성서약이 아니다. 존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만일 도움을 주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도움이 되기 위한 행위에 집중하는 것이다. 상대가 거절하더라도 포기하는 게 아니다. 기다림과 인내가 들어있는 게 사랑이다. 필요하면 밀고 당기기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건 단지 하나의 기술에 불과하다. 기술이 사랑을 위한 행위에 도움이 된다면 사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니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 없이 사랑하기란 불가능하다. 또한 자기를 직면하지 않고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 정직함이 빠진 사랑은 조건적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에게 헌신해야 한다. 이 말은 자기 욕심을 채우라는 말이 아니다. 자기가 하고 싶고 누리고 싶은 건 다 이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 집중하여 인격과 삶이 통합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역할에 따라 다르게 사는 삶은 분리되고 진실성은 떨어져 피상적이며 가식적이고 이중적으로 살기 쉽다. 아무리 노력해도 공허함을 채울 수 없이 뻥 뚫린 마음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메마른 삶은 사랑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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