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지적 자극이 될 때 우리는 함께 배울 수 있다
사람은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을 흥미로워하거나 신비해한다고 생각한다. 교사로서 나는 이 말이 사실임을 증명해보고 싶을 때가 많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특히 교실 상황에서 아이들이 신기해하는 경우는 드물다. 내가 발견한 신비는 아이들에게 전달됨과 동시에 사라져버린다. 아이들의 표정과 입에서 ‘그래서 뭐?’라는 반응이 나올 때 사람마다 반응이 다를 수 있음을 깨닫지만 아이들이 흥미를 갖고 배우는 모습을 보고자 하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흔히 동기부여라고 하지만 난 흥미 자아내기라고 부르는 수업의 첫 단계는 사실 매우 중요하면서도 가장 힘들다. 흥미 자아내기에 실패하면 곧장 다소 강제적 수단을 동원해야 하는 압박감을 받는다. 아이들이 전혀 수업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잘 가르칠 수 있을지에 집중하지 말고 어떻게 아이들이 배우는지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 한 사람으로서 나는 어떻게 배우는가에 주목했다. 그 과정에서 생각한 용어가 ‘지적 자극’이다. 이것은 생각을 확장시키고 탐구를 촉발시키며 질문을 통해 인지체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정보를 가리킨다. 물론 어떤 자극은 약하거나 힘이 미비하여 곧 잊히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강하고 특정한 정서를 불러일으켜 몇 시간 동안 토론을 지속하거나 며칠 동안 고민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수업은 지적 자극을 주는가? 이 말은 달리하면 수업이 재미있는가이다. 중학교 3학년에게 물어봤는데 거의 모두가 그런 건 절대 있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유학기제를 하는 중학교 1학년 아이들은 상당수가 재미있다고 말했다. 무슨 차이일지 생각해 봤는데 평가가 주요 원인으로 떠올랐다. 다른 요인들도 물론 작용하겠지만 평가 하나로 이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1월 말 모든 평가를 끝낸 중3 아이들에게는 수업이 거의 불가능한 반면, 2학기에 평가를 전혀 하지 않은 1학년은 12월말까지 평상시와 다름없이 할 수 있었다. 물론 1학년에게 수업이 매 순간 언제나 재미있는 건 아닐 테지만 적어도 평가로 인한 부담은 사라지니 배움 자체에 좀 더 에너지를 쏟을 수 있고 그것이 재미로 다가왔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헤르바르트의 ‘흥미는 자기활동’과 직결된다. 아이들이 특정한 사실이나 사물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기활동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수업이 자신의 경험과 생각의 확장을 가져오는 지적 자극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즉 아이들은 마음이 다루고 있는 사실에 깊이 몰두하여 당사자 자신의 활동에 의하여 그것을 자기 자신으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상황 속에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 인한 내면적 활동을 아이들이 할 수 있을 때 교사의 교육적 교수는 가능해지고 헤르바르트가 교육의 궁극적 목적으로 설정한 인격의 형성은 이상이 아닌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 이 말을 거꾸로 바꾸면 학교붕괴로 인한 인성교육의 강화로 압축될 수 있는 현 교육은 인격 형성의 실패를 드러내고 있는데 이것의 원인에는 아이들의 흥미를 자아내지 못하는 교수가 있다는 것이다. 흥미가 결여된 수업은 정보가 지식으로 전환되지 않고 이는 결국 사고권의 영역이 비어 있는 상태로 발전해 동물적 욕망만 남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선발적 교육체제를 공고하게 유지하는 평가가 가장 큰 장애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프레네가 ‘성적과 등급제는 언제나 잘못이다.’라고 지적한 부분에 동의한다.
아이들이 외부에서 주어진 정보를 하나의 지적 자극으로 삼고 거기에 몰두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특정한 기준으로 평가한다는 것이 과연 타당하기나 한 것인가? 그런 평가는 아이를 한 인격체로 인정하며 아이의 성장과 발전을 얼마나 도와주는가? 특히 흥미가 매우 중요한 어린 시기에 평가부터 들이대는 것은 분명한 패악질이다. 내면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갖기 이전에 외부의 강한 힘에 휘둘리는 것은 정체성 형성에 큰 지장을 주며 아이들의 마음에 들어찬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로 이어져 결국 인격의 황폐화를 가져온다. 어른의 무지한 욕망에 이끌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 채 코 꿰어 끌려가는 아이의 양산을 어찌 교육이라 할 수 있겠는가?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평가는 어떻게든 최소화하거나 없애야 한다. 다만 고차원의 상위 능력이나 직업 능력이 요구될 때 평가를 도입하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면 평가가 이끄는 수업을 흥미가 이끄는 수업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헤르바르트가 말한 통각적이고 다면적인 흥미를 교사의 책임 영역으로 두기에는 어려울 듯하다. 교사가 할 수 있는 영역이 무엇인지 규명하고자 할 때 흥미 자아내기조차 교사의 능력 밖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흥미는 전적으로 내적인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미라는 내적 작용이 일어나도록 지적 자극을 주는 것은 가능하다. 정보의 변환은 교사가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의 물리적인 형태를 하나의 자극으로 변환시켜야 외부의 정보가 내부의 지식으로 바뀔 수 있다. 여기에는 교사의 자극이 아이들에게는 같은 의미의 자극이 아니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각자 경험과 지식으로부터 만들어진 해석의 필터를 갖고 있으며 몸 상태와 마음 상태로부터 형성된 반응성이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실은 자체적으로 많은 상황적 요인이 작용하는 공간이다. 교사가 이 모든 것을 고려할 수는 없다. 다만 자기에게 흥미 있는 것이라고 아이들도 흥미 있어 할 거라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자기가 열과 성을 다해 만든 자료라고 아이들이 그런 정성에 기뻐할 거라는 착각 속에 빠지면 안 된다. 아이의 인지능력 수준과 과거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교실의 상황 맥락을 읽어 적절한 자극의 형태로 정보를 변형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교사나 학생 개인의 맥락에서 같은 공간에서 오랫동안 공부하는 공동체 맥락을 추가해야 한다. 모두 각자의 필터와 반응성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에게는 지식이 되는 반면, 누구에게는 의미 없는 정보로 남는 차이가 존재하는데 이것이 차별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차이가 독특성과 다양성으로 발전해야 하는데, 이것의 길을 터주는 것이 공유이다. 아이들은 교사의 지적 자극을 각자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도 함께 탐색하여 나눌 수 있으면 더욱 좋다. 그러면 교사의 지적 자극은 어느 특정한 형태로 아이들에게 다가갔지만 아이들에게서 수십가지의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다시 나오게 되고 교사의 자극보다 더 개인 내부로 침투할 수 있는 자극이 될 수 있다. 이런 공동체적 배움이 단선적 평가를 극복하고 인격 형성이라는 교육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