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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이형 May 06. 2016

교사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학교에서 교사는 스스로 성장하기 힘들다. 그 이유는 학교의 지배 구조때문으로 보인다. 지배 구조란 교사를 누군가의 통제하에 두고 주어진 명령 수행자로 두는 환경을 뜻한다. 주어진 테두리를 벗어나는 자를 그냥 두지 않고 경고 또는 처벌로 다스리는 구조를 뜻한다. 이런 구조를 날마다 체험하며 살아가는 교사에게 성장을 기대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난 교사에게 성장해야 한다는 당위를 부과하는 것에 반대한다. 누구나 당위성으로 말하는 것만큼 쉬운 것은 없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당위로 교육받아 왔다. 이미 정해진 규칙의 테두리 안에서 스스로 규칙을 만드는 것을 거부당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말은 어릴 적 들어왔던 당위를 그대로 반복하기만 하면 된다. 반면에 행동은 자기의 힘으로 당위를 실천하여 몸으로 만들어낸 경험이다. 경험에는 상황 및 타인과의 상호작용으로 어릴 적 당위를 잠재울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 당위로만 밀어붙이다가는 타인과 갈등만 초래할 뿐이며 당위를 행동으로 옮기다 보면 부딪치는 상황들이 호락호락 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며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다양성과 복잡성을 존중하게 된다.


성장은 당위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해야 한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어느 한 쪽의 말을 듣도록 강요당한 사람은 자기 목소리를 만들 기회를 갖지 못했다. 자기 것이 없는데 어떻게 성장하겠는가? 모름지기 성장이란 내면이 자라는 것을 뜻한다. 내면은 외부의 것이 아니다. 스스로 만든 것이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서 존중받으며 타인과 상호작용할 때 내면은 비로소 존재가 드러난다. 그런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고 자랄 수 있는 양분을 줘야 성장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학교의 지배구조에 갇혀 있는 교사에게 성장은 헷갈리면 성공이요,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이다. 그런 환경에서는 저항하거나 스스로 환경을 개척하는 교사에게 성장은 성공처럼 다가온다. 뚜렷한 목표와 성취의식을 갖고 도전하는 식으로 풍요로움과 채움을 가져다주는 성장이라기보다 뭔가 이루어낸 성취감이 더 큰 성장이 있을 뿐이다. 내면은 파커 파머의 말처럼 수줍은 영혼과도 같다. 갑작스럽게 다가가면 순식간에 사라지지만 천천히 다가가서 온전한 마음으로 대할 때 내면은 자기 소리를 낼 수 있다. 교사의 성장도 이렇게 내면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학교 환경이 내면을 충분히 논하기에는 황량한 사막과 같다. 그래서 학교의 변화를 성장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더라도 오해 없길 바란다. 그렇게 해서라도 성장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땅이 척박하더라도 햇빛과 물이 있으면 생명이 피어나는 것처럼 성장은 인간에게서 결코 완전히 빼앗을 수 없는 내재적 힘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여기서 예로 드는 사례를 성장이냐 성공이냐로 구분하기 전에 학교 변혁의 성공 경험이 교사의 내재적 힘인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지금부터 그 논의를 하려고 한다.        



학교 민주주의는 필수이다.


학교가 지배구조 체제를 가질 수 있는 결정적인 원인은 교장의 절대적 권한 행사이다. 무엇을 하든 교장의 책임이란 말이 교장이 무엇이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라는 의미로 바뀌면서 교장 맘에 안 들면 그 무엇이든 거부할 수 있고, 교장이 원하면 그게 무엇이든 해야 하는 일방적 명령 구조가 되어 있다. 물론 교육청이 평가로 교장을 통제하고 교육부가 공문으로 명령을 하달하고 있지만 적어도 학교 내에서는 교장이 우두머리로 지배 구조의 정점에 있다. 만일 교장이 자신의 권력을 위임하고 민주주의를 실행한다면 강고한 지배구조는 무너질 수 있고 교사를 믿고 권력을 분산시킨다면 교사의 수동적 지위는 상당부분 해소될 것이다. 문제는 교장이 갖고 있는 오랜 불신과 통제중심의 신념이다. 교사를 나태하고 무책임하며 열정 없는 존재로 보는데 그 누가 열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열심을 갖고 임하면 칭찬을 듣기도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기 십상이다. 너 때문에 우리가 욕먹는다며 모난 돌 정 맞는다는 속담을 주지시킨다. 게다가 열심히 하다보면 실수가 생기기 마련인데 열심 있는 교사에게서 생기는 실수는 비웃음거리가 되거나 징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혼자 의롭고 잘난 척 하더니 저 꼴 좀 보라며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다.


민주주의 안에는 존중과 신뢰가 들어 있다. 존중은 쉽게 내리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고 신뢰는 잘 될 거라는 일종의 긍정적인 믿음이다. 교장이 교사들에게 학교 행사를 결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한 것도, 교사가 학생에게 모둠 구성방식과 발표 방식 및 행사를 의논하고 결정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도 모두 존중과 신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보통 교사들은 새로움에 대한 거부감이 많다. 잘 안될 것이 뻔하다는 불신으로 팽배해 있다. 학교 환경이 강한 통제 위주로 흘러가니 학생에게도 불신과 통제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깨뜨리는 도구가 민주주의이다. 한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생각을 말하며 공유하면 자연스럽게 더 나은 결정이 나온다. 불신과 불안이 결국 통제를 강하게 만들고 수직적 구조를 견고히 하는 반면, 존중과 신뢰의 민주주의는 참여와 협력의 기회를 만들고 더 나은 대안을 생각하는 시도와 도전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성장의 발판이 된다.   



무엇을 하든 본질에 가까울수록 좋다.


내면이 성장하려면 피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시험은 피상이다. 이것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기는 힘들다. 물론 시험 결과를 갖고 반성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시험 성적이 기대 이하로 나왔기 때문이고 더 나은 성적을 위한 동기로 작용할 뿐이지 내면의 성찰을 위한 것은 아니다. 성적을 올리고자 하는 동기 역시 피상에 머문다. 성적은 외적인 압력이기 때문이다. 성적은 우리 사회에서 성공을 측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지표이며 성공자와 실패자를 나누는 기준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성공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특정 기준에 의해 재단되는 성공이기에 외부의 것, 즉 피상인 것이다. 이것이 아무런 성찰도 없이 내면으로 파고든다면 수동성을 부추기고 그 힘을 키우는 결과를 낳는다. 외부의 힘이 크면 클수록 내면의 힘은 죽게 되고 결국 영혼 없는 삶, 생각 없는 삶, 그저 생계본능에 충실한 삶, 시키는 것이 편하고 스스로 하는 건 불편해하는 삶,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삶, 저항과 거부 없이 나쁜 것도 수용하는 삶, 각자도생의 삶으로 변모하고 만다.


피상에서 내면으로 들어가는 일을 별로 해보지 못한 채 교사가 된 사람들은 내면을 키우고 성장에 초점을 둔 교육을 할 수가 없다. 그게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이 받은 교육을 재생산할 뿐이다. 아이들에게 성적이 중요하니 공부하라고 말하고, 기존 사회 질서에 순응하여 규칙을 준수하라고 말하고, 자기 생각과 주장이 뚜렷하면 건방지거나 예의 없는 학생이라 쉽게 딱지 붙이고, 자기 말 잘 듣는 학생을 착하고 그렇지 않으면 반항아로 규정짓는 일에 익숙하다. 아이들이 살아온 각자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음에 답답해하는 것이 그 증거이다.


성적이 본질은 아니다. 질서도 순응이나 어른에 대한 예의도 역시 본질은 아니다. 본질은 삶이고 그걸 존중하는 것이다. 존재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가끔씩 삐져나오는 감정의 역동과 그들만의 색깔을 받아들이되 공동체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본질이다.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성장하는 기회가 된다. 그런 도전 앞에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어렵지만 해보지 않은 길을 가면서 어설프더라도 시도하는 것이 성장의 자양분이다.



생각을 만들 시간이 필요하다.


자기 생각이 뚜렷한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가? 경계하고 그 사람 앞에서 조심하며 말을 아끼는가? 아니면 그의 생각을 듣고 자기 생각을 나누며 생각을 키울 기회로 삼는가? 생각을 말할 때 단정적이거나 당위적으로 말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분명 있을 수 있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뉘앙스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비언어적 의사표현은 불편함의 정도를 넘어서 역겨움까지 줄 수 있다. 하지만 생각이 다를 때 그것을 반대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지적 자극으로 받아들이는가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반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정서적으로 반응한다. 상대의 반대를 불수용으로 인식하고 마음이 상하는 것이다. 그게 여러 번 반복되면 싫음의 표현으로 인식하고 비난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반응은 성장을 막고 오히려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편협의 늪에 빠진다. 성찰의 기회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지적 자극으로 받아들이면 성장한다. 지적 자극이란 생각하도록 만드는 자극이다. 생각을 명확하게 하거나 확대하거나 수정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사고의 성장뿐만 아니라 성찰의 깊이도 달라질 수 있다. 다름을 수용할 때 성장은 가능하지만 틀림으로 규정짓는 순간 우리의 사고체계는 경직되어 그 자체가 권력으로 작동한다. 학교 교무회의를 살펴보자. 일단 모두가 평등한 지위를 갖고 발언할 수 없으며 의견을 주고받는 회의가 아니다. 그보다는 지시를 받아 적고 교장의 훈화를 들어야 하는 받아쓰기하는 곳이다. 반대 의견을 누군가 말하는 즉시 분위기는 얼어붙고 의견 제시자가 그 책임을 뒤집어쓴다. 분란이나 일으키는 갈등 조장자로 낙인찍히고 학교 조직에서 배척당하기 쉽다. 이렇게 경직된 학교 문화까지 언급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토론에 익숙한가? 토론하다 내 의견을 반대하는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혹시 그로 인해 마음 상한 적은 없는가? 생각의 차이를 반대로 받아들이고 마음 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에 당혹스러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토론 문화가 이리도 미천한가? 토론하다 언성이 높아지고 분노를 표현하고 누군가는 사과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생각이 다른 걸 표현하는데 왜 용기가 필요한가? 그걸 말하는데 왜 긴장하는가?


이러한 현상의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 생각을 만들어갈 시간과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른의 생각을 주입하고 그걸 당연하다 여기라는 당위부터 만들었기 때문이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어?’, ‘왜 도대체 네 마음대로 하는 거야?’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내뱉으며 아이를 주눅 들게 한다. 선생님이 하는 말을 경청하고 그 지시대로 이행하는 것이 예의라고 배운다. 아이들의 의견이 교사의 의견과 반대될 경우 다수의 아이들보다 하나인 교사의 의견이 더 중요시되는 교실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자기 생각을 만들 수 있을까? 자기 생각대로 해볼 기회를 박탈당하고 오히려 꾸지람을 듣는 환경에서 어떻게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자라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


교육은 존중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다. 어른이 보기에 별 볼일 없는 의견이라도 존중하고 표현하도록 할 때 주체자로 설 수 있는 교육적 기회가 된다. 생각이 같을 수 없음을 처음부터 전제로 삼고, 획일성의 편함과 쉬움을 택하기보다 다양성이 주는 복잡함과 혼란스러움을 받아들여야 아이들을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키울 수 있고 그러면서 교사는 존중을 배울 수 있다.


자기 생각을 만들면 외부의 압력에 쉽게 굴복하지 않게 된다. 수동적인 객체로 살아가지 않고 주체로 살아갈 수 있다. 생각이 다르더라도 같은 방향으로 가는데 동의만 이루어지면 학교 교육의 틀 안에서 공존하며 협력할 수 있다. 획일적인 사고를 피하고 누군가의 생각이 다수를 지배하는 수직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성장의 본질이다.           



시도와 도전이 필요하다.


폐쇄적인 의사소통의 수직적 구조와 닫힌 교육과정의 지속적인 수행으로 굳어지고 고착화된 학교에서 교사가 성장하기 힘들다는 건 이미 언급했다. 그런 곳을 유연하게 만들어 다양성이 내포되게 하려면 그것을 깨려는 시도와 도전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기존 틀이 강고할수록 더욱 그 필요성은 증대한다. 왜냐하면 그런 곳은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곳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도, 성장을 꿈꿀 수 있는 곳도 아니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창의성의 시대로 본다면 지금과 같은 구조로는 절대로 창의성을 기대할 수 없다. 창의라는 단어를 목표로 삼고 힘을 실어 말한다고 한들 갑자기 창의성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걸 학교 조직과 관료 조직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공문만 해도 그렇다. 세부사항까지 규칙을 갖고 있는 공문의 형식과 전달되는 방식, 그리고 단계를 거쳐 보고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책임만 강조하고 틀에 얽매이게 할 뿐 그 속에서 창의적 사고는 용납되지 않는다. 오직 받아쓰기 사고만 증대할 뿐이다. 권력자의 말을 받아들어야 될 뿐만 아니라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것도 틀린 답이 된다. 글자 그대로, 주어진 의도 그대로, 해보고 싶은 열망을 누르고 ‘이렇게 해도 될까’라는 생각으로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하며 눈치 보기에 능숙한 그런 사고가 어떻게 다름을 차이로 인식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교육은 시도와 도전의 장이 되어야 한다. 위험은 당연히 존재한다. 그러기에 더 가치가 있다. 위험을 배제한 곳은 무균실과 같아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지 않는다. 알에서 깨어 나오기 힘들다고 밖에서 깨주면 비정상의 몸을 갖게 되는 것과 같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 하더라도 생명이 있다면 스스로 성장하는 힘과 욕구가 있다. 주변을 탐색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사물을 만지고 움직여보고 심지어 입으로 가져가기도 한다. 그것과 관계 맺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을 자기 식대로 받아들이는 중이다. 이런 자기 의미부여 과정이 자기가 누구인지 파악하는 정체성 형성 작업과 직결된다. 외부의 지시와 명령에 순응한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외부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규정하는 것을 꼼짝없이 수용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외부의 규정이 곧 자기 규정이고 외부의 당위가 자기 양심이 되었으며 권력자의 인정과 칭찬이 곧 자기 사랑의 근원이 되었다. 이런 걸 어떻게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도와 도전은 정해진 규칙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시도와 도전이라 부른다. 갈등을 일으키지 말고 모든 일을 안정적으로 해야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시도와 도전이 되겠는가? 그렇게 요구하는 사람이 무능한 것이다. 마음에는 항상 즐거움만 가득해야 한다는 편협한 사고가 들어차 있고, 자기 식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통제 본능이 가득하고, 반대와 저항이 생기면 누르거나 모른 척 해버리는 것이다. 삶에는 온갖 문제들로 가득하다는 명제를 인정한다면 시도와 도전 속에 문제해결력이 생기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처음에는 주어진 틀 속에서 적응하며 안전하고 싶은 욕구를 채울 수 있지만 성장을 계속 하다보면 그 틀이 주는 안전은 곧 답답함이 되고 억압의 상징물이 된다. 이 때 우리는 저항하게 된다. 저항은 반항과 다르게 봐야 한다. 우리는 반항에는 매우 부정적인 뉘앙스를 느끼지만 저항에는 오히려 긍정적이다. 반항은 무정부식으로 정당한 지도와 가르침도 거부하는 막가파가 연상되지만 저항은 독재와 비상식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인식한다. 학교에서 기존 틀에 의문을 제기하고 변혁의 소리를 내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보는가? 반항한다고 보는가? 아니면 저항한다고 보는가? 거기에 우리의 가치관이 들어 있다.


교사는 가르침 속에서 성장하기에 아이들에게 시도와 도전의 기회를 주고 그것을 도와주는 것은 곧 자기 성장이 된다. 아이들이 성장을 막는 비합리적이고 권위적인 학교 구조를 타파하는 것도 역시 아이들 성장이자 자기 성장으로 이어진다. 환경을 바꾸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렇다.


2013년 연구부장을 할 때 경기도 교육청에서 지필평가를 1~2회로 할 수 있다는 지침이 내려왔다. 평소 지필평가에 매몰되어 벼락치기에 익숙해져버린 아이들이 시험 하나에 너무 목을 매는 현상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차에 나의 권력을 이용하여 상당히 많은 교과에 지필평가를 1차나 2차에 한번만 보고 대신 수행평가를 늘릴 것을 요구하였다. 수학과 과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과목에서 지필평가 비율이 축소하고 수행평가가 대폭 늘어났다. 그러자 학부모들에게 항의가 들어왔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초등학교까지 학습 습관을 잘 다져왔는데 갑자기 공부에서 손을 놓는다는 항의이자 이렇게 하다가 고등학교에서 적응을 못하면 어떻게 하냐는 걱정과 불안이었다. 그러면서 소위 주요과목은 지필을 2회 모두 보고 수행평가를 줄여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 요구는 지속적으로 평가의 변혁을 시도하는 학교를 그냥 두지 않았다. 2학기에는 부장들과 학부모들이 모여 간담회도 했다. 내가 나서서 부모들의 불안에 대해 20분 이상 말했는데 설득이 잘 되지 않았다. 결국 다음 해에 다시 소수 과목만 제외하고 2회 지필평가를 보기로 하고 수행평가의 비율도 줄였다. 다행히 예전으로 회귀한 것은 아니었다. 수행평가를 늘려서 시행한 경험은 무의미하게 남지 않았고 오히려 수업과 평가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을 듣고 기존의 틀로는 성장할 수 없다는 반성으로 나아갔다.


2012년부터 학기말 시험을 모두 치른 후 방학 때까지 남는 시간에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처음에는 2일 반으로 하다가 지금은 5일간 실시한다. 첫해에 난 우리 반에서 연극을 했다. 주제는 아이들이 원하는 전래동화나 생활이야기로 삼았는데, 많은 아이들은 전래 동화를 갖고 연극을 했다. 아이들은 구상부터 대본 짜기, 소품만들기, 연습까지 모든 과정을 주도적으로 했다. 별로 기여하지 않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모두 끝까지 과정을 마쳤다. 소감문에는 교사가 주도하지 않아서 좋았고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해본 소중한 경험이라는 내용이 많았다. 그로부터 올해까지 4년간 실시하는 프로젝트는 아이들이 수업에서 할 수 없었던 주도성을 발휘해 주제를 정하고 조사를 통해 나름의 결과물을 발표하기까지 교육적이면서 좋은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다.


2014년부터 학년제를 스몰스쿨제로 확장하면서 학년을 독립적인 학교로 보자는 아이디어를 실행으로 옮겨 학년부장을 2명으로 늘려서 생활교육부장과 교육과정부장이 생겨났다. 난 교육과정부장을 맡아서 학년의 주제통합 교육과정 짜기와 교과별 교육과정 연결하기, 학년 수업연구회, 교무실 청소 등을 주로 했다. 그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시도는 ‘수업나무’였다. 이것은 교사 프로젝트 동아리에서 같은 학년 3명이 맡아서 1년 동안 실시한 프로젝트였다. 전기세를 절약하기 위해 고지서에 전보다 많이 내면 우울한 얼굴의 스티커를 주고 적게 내면 웃는 얼굴의 스티커를 붙인다는 것에 착안해서, 반별로 수업 평가 항목을 정해 스티커를 붙여주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그렇다면 현재 모둠 중심 수업이 많은데 그런 수업을 평가하려면 수업에서 핵심이 되는 항목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몇 가지 항목을 만든 후에 여러 선생님들에게 투표를 부탁해서 그 중 많은 것을 선정했다. 이렇게 나온 것이 ‘경청’, '도전의식’, ‘협력’, ‘과제수행’이다. 이 4가지 항목에 각각 2~3가지 물음을 붙여 해당 반에 들어가시는 모든 교과목 선생님들에게 좋음, 보통, 나쁨으로 평가를 부탁했다. 그걸 모아서 각 항목별로 평균을 내서 좋음, 보통, 나쁨의 숫자대로 각 스티커를 수업나무에 붙여준다. 그리고 그걸 반에 주면서 수업에 대해 회의를 하도록 했다. 아이들 회의에서 각 항목별 나온 평가 결과로 수업 약속이 만들어질 것을 기대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반 아이들 모두에게 설문을 돌려 자기평가를 하도록 했는데 교사 평가보다 훨씬 잘 나왔다. 교사의 기대수준이 높은 것인지, 아이들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아서 그런 것인지, 소수의 수업 방해자로 인한 인상이 반 전체로 퍼져서 그런 것인지 더 후속 연구가 필요한 지점이었다. 그리고 성적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고 1명씩 선택해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성적 상인 학생들은 수업나무가 수업에 대해 반성하는 계기를 주었다고 말하는 반면, 하인 아이들은 별로 의미 없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어차피 그런 걸 해도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상인 아이와 하인 아이의 패러다임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무기력이 결국 수업의 성공여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는 걸 깨달았다.           



나눔과 공유, 그리고 개방이 답이다.


최근 학교 내부에서 교사 4명, 학부모 1명이 모여 학교를 평가하기 위해 함께 회의한 적이 있다. 교육청에서 준 항목을 하나씩 보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우리 학교는 민주주의가 잘 안착된 학교라서 그런지 개방과 공유를 기반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우선 2월 연수에 전교사가 모여서 관계성 향상 프로그램으로 각 학년별 교사 공동체 세우기를 한다. 그리고 함께 모여 신입생 축하곡 연습을 하고 각 프로그램마다 강사를 초빙해서 연수를 듣기보다 함께 논의하고 만들어간다. 3월 초에는 각 반에서 오리엔테이션을 10시간 이상 실시한다. 반 단위로 공동체 만들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학년수업연구회는 4~5명으로 소그룹으로 나누고 월마다 공개주간에 수업 공개자를 정하고 비는 시간에 들어가 수업을 보고 그 다음 주에 소그룹 내에서 나눈다. 소그룹이기에 부담이 없고 허물없이 각자 느낀 점을 말한다. 올해부터는 학년 독서모임을 구성해서 모두가 참여했는데 역시 소그룹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학년협의회는 정해진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합의를 하며 결정된 사항은 바로 시행한다. 무슨 행사이든지 항상 학생들로부터 평가를 받고 개선점을 만든다. 11월에는 3회에 걸쳐 교사 대토론회를 진행하는데 이 역시 소주제를 정해 모둠별로 이야기하고 공유를 하는 방식으로 한다. 그리고 나온 의견으로 내년도 방향과 학교 형식을 정한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과 외부에서 주어진 일 처리에 익숙해져 고립되고 소외된 교사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학교 교육의 주체로 탈바꿈한다. 이것을 성장이라 부르기에 충분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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