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는 문학 교육에서 문법 규칙은 최소화해야 하고 대신 문학의 문체와 내용을 더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언어 공부는 학습자의 지력을 발달시키고 일상생활의 지식을 확장시키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어의 형식에 대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아이들이 암기하도록 하는 것보다 대화를 통해 언어를 비형식적으로 접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난 그의 문학 작품에 대한 견해를 보면서 본질과 형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문학은 삶의 다양함 속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고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어떤 삶을 살면 좋을지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하지만 내가 학교에서 배운 문학은 분석한 정보 조각들에 불과했다. 그것도 다른 누군가가 해 놓은 것을 그대로 외워야 하는 매우 수동적인 교육을 통해서였다. 그래서 내가 소외된 상태로 작품에 대한 이해는 겉돌 수밖에 없었고 감상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문학만이 아니었다. 거의 전 과목에서 그걸 왜 배워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어떤 의미로 나에게 다가오는지 알지도 못한 채, 오로지 시험을 잘 보기 위해 떠다니는 정보들을 기억에 구겨 넣고 종이위에 재생할 뿐이었다. 나는 이렇게 앎에서 개인적인 의미가 상실된 상태를 형식이라 지칭한다.
형식은 일종의 틀이다. 원래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지만 일단 그 형태가 갖추어지면 쉽게 경직되어 버리고 점점 강고해지면서 사람들을 가두게 된다. 그리고 다른 형식을 추구하거나 형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형식에 익숙해진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틀에 안주하면서 안전을 누려온 삶의 양상은 틀에서 벗어나면 불안과 두려움을 갖게 되는 기본적인 심리의 작용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틀을 깨려고 하면 공격하게 된다. 이런 심리는 이익과 결부될 때 그 힘이 더욱 강해진다. 이익에 더욱 집착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형식 안에서 강한 힘을 갖게 될 때 형식은 특정한 계급 구조 안에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방식으로 그 틀이 굳어진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단절과 소외를 경험하며 생존이 삶의 두드러진 양태가 된다.
반대로 의미가 앎을 규정하고 개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 본질이다. 관계는 일정하게 그 형태를 유지하는 고정성보다는 언제든 형태가 변화할 수 있는 융통성을 더 선호한다. 개인은 주체가 되어 주변 사람과 사물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관계를 맺는데, 그것은 언제든지 끊어질 수도 있고 다시 연결될 수도 있으며 연결 강도가 강해지거나 약해질 수도 있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모르게 되고 경계가 뚜렷하다가도 다시 모호해지는 특성이 나타난다. 안전과 뿌듯함이 있지만 동시에 실패와 좌절도 있다. 개인의 주체적 행위들이 주변 사람과 사물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상호작용하면서 의미를 만들어가기 때문에 상호 연결된 공동체를 구성할 수도 있다.
우리가 배우는 학문에는 수많은 규칙이 존재한다. 우리는 규칙뿐 아니라 규칙을 통해 표현되는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관계가 깊어질 때 그 대상은 죽어버린 사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가 될 수 있다. 즉, 이미 알려진 규칙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규칙을 발견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위대함은 이렇게 깊은 관계를 통해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고 새로운 앎이 만들어질 때 탄생한다. 반면에 기존 규칙에 얽매이면 그것의 경계를 뛰어넘을 수 없으며 그것은 일방적 관계의 틀로 규정된다. 뚜렷한 경계로 인해 명확함은 얻을 수 있지만 발견을 통한 신비는 체험할 수 없는 것이다. 앎은 단편적이 되고 굳어진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 일종의 교만으로 이어지며 권력이 되어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타락의 길을 가게 된다. 결국 위대함과 타락의 차이는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에 달려 있다.
관계 맺기는 인간의 생득적 능력이다. 누구나 나와 연결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관계의 폭이 넓어지고 기존의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깊이를 더해간다. 교육은 관계 맺기의 능력을 키워주는 장이고 교사는 관계 맺는 모범을 보이거나 촉진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아이들은 교육을 통해 삶이 풍요롭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렇게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학교가 비록 특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관계 맺기라는 본질로 들어갈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단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