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연민의 정서가 얼마나 있는가?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사건에 대해 우리 사회는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희생자 유가족에 대해 동정심을 갖고 진실을 밝히는 게 중요하다는 자세를 가진 부류와 유가족이 너무나 과도한 걸 원하며 대통령이 잘못한 게 뭐가 있냐며 감싸는 부류이다. 세월호 유가족이 진실을 밝히라며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농성을 할 때 이 두 부류는 명확히 드러났다. 그들을 찾아와 응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다른 쪽에서 치킨을 먹으며 조롱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소위 일베라 불리는 사람들과 극보수를 자처하며 새누리당이 하는 건 뭐든지 찬성하고 반대의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어버이연합이 그들이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국가의 무책임에 대한 분노가 겹쳐진 이들에게 최소한의 연민도 보이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불쌍한 생각도 들었다. 최소한의 인간적 정서가 배제된 상태로 오랫동안 살아온 그들에 대한 연민이었다.
최근 전경련이 어버이연합에게 활동자금을 대 준 사실이 드러나면서 집권세력과의 검은 커넥션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어버이연합의 노인들이 세월호 유가족을 적대시하고 특정집단화해서 고립시키고 공격했던 이유가 고작 돈 때문이었던가? 이들을 전면에 내세워 공격부대로 삼고 뒤에서 조종한 이들은 누구란 말이며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조선말기 친일행적을 통해 부를 축적한 친일파가 일본의 패망과 미군정의 정부수립 과정에서 정부의 주요 요직을 차지한 사실은 익히 알려진 바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고의로 해체하고 친일파를 엄호했던 자인데 이런 사실보다 초대 대통령이며 건국의 아버지로 더 많이 알려진 이유는 친일파 세력이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바로 반민족친일행적을 자행한 자들의 치부를 숨기기 위한 치졸하고 반민주적 행위이다.
친일파는 자기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북한의 전체주의를 그대로 따라하면서 반공주의를 채택했고 이를 국민들에게 주입했다. 남북내전 이후 대립이 지속되는 상황을 이용하여 사상적 자유는 물론이고 정부에 반대하는 그 어떤 세력도 국가권력으로 잔인하게 짓누른 행위는 국민의 정서를 황폐화시켰다. 예를 들어, 영화 변호인의 배경이 되는 부림사건은 노동자들을 교육하는 야학행위에 간첩혐의를 뒤집어 씌운 사건이다.
우리나라의 노동환경은 최악이다. 1970년 11월 전태일은 미장공들의 열악한 상황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과 함께 분신을 했다. 그러나 그의 분신도 노동자들이 사용자들에게 철저히 복속되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있는 환경을 바꿔내지 못했다.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환경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노동자들이 임금협상 결렬로 법적으로 보장된 파업을 실시하면 사용자들은 모든 손해를 노동자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사법부는 사용자 편을 든다.
학교는 어떠한가? 지금은 학교도 민주주의의 바람이 불고 있지만 여전히 일각에서는 수동적이고 폭력적인 교육이 횡행하고 오직 상위권 대학을 목표로 비인간적 행위가 자행되고 있다. 경쟁의 심화는 친구들 간에 위화감 조성으로 이어지고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힘을 갖고 있거나 부를 갖고 있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되어 있고 약한 자들은 따돌림의 대상이 되어 있다. 학교 폭력은 신체적, 언어적, 사이버적으로 전방위에 걸쳐 있고 자신이 누군가를 괴롭힐 수 있다는 우월의식은 자부심 또는 자신감으로 변질되어 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반이 된다는 보편적인 정서적 진리는 오히려 남의 기쁨에 시기로, 남의 슬픔에 조롱으로 화답하는 아이들로 인해 그 뜻이 무색해졌다. 학교에서의 배움이 성장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성공과 부의 축적으로 이어진다는 인식이 팽배해짐에 따라 아이들은 마치 성공을 향해 미친 듯 날아가는 불나방처럼 삶을 돌아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지겨운 공부, 하지만 성적을 위해선 해야 하는 공부에 지배당하는 아이들의 삶이 정서적으로 황폐화된 건 당연한 일이다.
다시 세월호 사건으로 돌아가보자. 고작 몇푼 받겠다고 인간됨을 포기한 어버이연합 회원들의 정서는 어떠한가? 타인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라버린 연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런 맥락에서 이명박 후보가 내세운 부자되세요가 맴도는 이유는 우연일까? 경제적 가난이 정서적 황폐화를 가져왔다는 주장은 논리적 비약이 심해보이나 그 속에 생존본능만으로 기회를 엿보고 돈과 권력을 좇았던 친일파의 삶의 방식이 엿보이는 것도 논리적 비약일까? 복잡다난한 삶 속에서 배움과 깨달음의 기회를 부여잡아 성장의 발판으로 삼을 생각을 하기보다는 오로지 성공을 위한 기회로 바라보는 기회주의가 삶의 양태로 자리잡은 이들에게는 연민을 품을 정서적 여유가 없다. 타인은 자신의 성공에 하나의 도구이거나 걸리적거리는 장애물로 보이는데 어떻게 연민을 생각할 수가 있겠는가? 오로지 이기고자 하는 욕망만 먹이를 주고 키웠으니 사람에 대한 이해나 긍휼의 마음을 가질 여력이 없는 게 아니겠는가?
세월호 사건을 통해 우리가 고찰해야 할 것은 진실을 밝히는 작업을 가리켜 진흙싸움이라 꼬리표 붙이고 갈등을 부추긴다고 표현하는 사회 분위기만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연민이 없이 비방과 비하를 일삼는 우리의 삶이다. 무리를 짓고 당파를 만들며 서로를 적대시하는 정치사회적 현실을 직시하고 그 속에 숨어 있는 반인간적인 정서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연민의 마음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다. 아무리 악인이라도 연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욕망과 적대감에 사로잡힌 그의 인생을 생각해 보면 불쌍한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갑을 관계를 고착화시키는 수직적 관계의 정점에서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도 역시 연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토록 많은 재산을 갖고도 더 갖고자 하는 유아적 소유욕과 천민자본주의의 대표격인 그들이 불쌍하지 않은가?
연민의 마음은 단지 불쌍하다는 생각에 그치지 않는다. 연민은 상대와 연결을 만들 수 있는 정서이다. 대상은 사람만이 아니다. 동물, 곤충, 식물, 심지어 무생물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연민을 통해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처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보이는 반응은 유사하다는 것과 환경의 적대성 정도에 따라 반응양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연민으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다. 적대적인 환경에서는 나를 위협하는 존재라 여기고 공격과 방어의 모습을 보이지만 평화로운 환경에서는 서로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갖는 연민은 적대적 환경을 사랑이 흐르는 환경으로 바꿀 수 있다. 긴장과 두려움의 환경을 서로 연결되어 평화로운 환경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환경안에서 영향을 받는 존재이지만 또한 환경에 영향역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런 영향은 사람만이 갖고 있는 놀라운 힘이기도 하다. 연민의 정서가 사회적 정서가 되도록 하려면 연민을 갖는 마음을 연습해야 한다. 적대감 대신에, 분노 대신에, 지배욕망 대신에, 승리로 가장한 우월감 대신에 연민을 선택하자. 그게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