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존재적 자아를 키우는 일이다.
우리는 존재로 대해질 때 존재적 자아가 힘을 발휘하지만 그렇지 않고 기술로 대해지면 존재적 자아는 숨고 대신 기술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자아가 전면에 나선다. 전략적 자아란 누군가의 기술로 인해 상처받지 않기 위한 나름의 생존전략을 구사하는 의식적, 무의식적 자아를 뜻한다. 그러니까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해주면 존재적 자아의 공간인 내면이 커지게 되지만 특정한 틀에 가두려고 하면 거기에 저항하면서 자신에게 올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습득한 전략이 발동한다는 것이다. 전략은 마치 전투에서 군인이 전면에 나서서 온갖 무기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군인이 나서는 전쟁을 생각해보라. 온갖 폭력과 무력이 난무하고, 이기거나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 삶을 가득 채운다. 우리의 삶이 전쟁과 같다면 그 얼마나 힘들고 비참한 삶이 될 것인가!
하지만 우리가 존재적 자아로 살게 된다면 우리 내면에는 긍정의 에너지가 흐르고 마음에는 평화와 행복을 유지하고 싶은 의지로 차오르게 된다. 온갖 수단과 방법에 골몰하는 전략적 자아를 선택할 필요성을 상실하고 대신 주어진 상황에서 생긴 위기를 오히려 기회 삼아 타자를 이해하며 수용해서 자신을 확대하고자 한다.
여기서 전략적 자아의 상실은 선택적 의지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으나 자연적인 흐름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 차이는 존재적 자아의 힘의 강도에 달려 있다. 존재적 자아는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인간의 본질이다. 하지만 태어난 직후부터 접하는 환경의 질에 의해서 그 힘이 결정된다.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고 충분한 사랑으로 보살핌을 받으면 그 힘은 평생 갈 수 있다. 반면에 요구가 강압적으로 그 삶을 채우기 시작하는 적대적 환경에서는 생존본능에 따라 온갖 전략들을 개발하여 공격과 방어적 기술을 습득하는데 집중하여 존재적 자아는 전혀 힘을 쓸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존재적 자아로 살다가 점차적으로 환경에 의해 전략적 자아로 변하는가?
인간의 불완전성은 항상 주고 받는 상호작용을 내포한다. 그래서 무조건적 수용과 사랑은 불가능하다. 부모라 할지라도 인간의 불완전함에 갇혀 있어 매순간 조건이 무조건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 이룩한 문명도 상당부분 배제적 조건들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왔다. 그래서 아이는 존재적 자아와 전략적 자아, 두 가지를 모두 갖고 태어난다고 해도 무방하다. 겉으로 보기에 존재적 자아는 선천적이고 전략적 자아는 후천적이지만 후천적이라고 할만큼 시간의 차이가 거의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둘은 마치 선과 악이 공존하듯이 한 개인 안에 공존하고 있다.
전략적 자아는 기술, 테크닉, 방법 등으로 불리는 도구가 유일한 자산이다. 그게 없으면 의미도 사라진다. 기술과 전략은 그것을 얼마나 잘 사용하는가하는 효용성에 의해 값이 매겨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팔릴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최대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한다. 전략적 자아는 세상을 온통 기술로 채우고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 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 유용함을 검증하고 증명하고 자신의 성공경험을 만들어가려고 한다. 세상은 통제와 조작의 대상이고 지배욕구를 채울 수 있는 기회이다. 성공이란 욕구 실현의 경험이고 실패는 그것의 좌절이다. 전략적 자아의 힘이 강할 때는 좌절을 이겨낼 수단을 강구하고 타인을 지배하고 복수할 기회를 잡는다.
이는 어릴 때부터 부모의 기대나 친구의 기대가 자신에게 무비판적으로 내면화되어 그런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 마치 자신의 삶인 양 착각할 경우, 그러니까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일 때 나타나는 자아의 모습이다. 아무리 타인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도 기준이 타인에게 있다면, 결코 그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음은 자명하다. 자기 스스로 그것을 변경할 수 없고 타인의 기대는 수시로 바뀌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틀림없이 불안을 야기하며 이를 해소하고자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개발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공격과 방어의 매커니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걸린 상태에 이르게 된다. 마음에 평안은 느끼기 힘들고 타인의 말과 행동은 불안을 일으키는 자극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을 제압하거나 굴복하거나, 무시하거나 회피하는 전략들을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전략들은 파괴적이므로 분열 발생은 필연적이다. 분열은 자신의 존재적 자아와 전략적 자아의 충돌이 생기고 존재적 자아는 모습을 감춰버리는 현상을 뜻하는데, 이런 분열은 관계가 연결되지 못하고 분리되는 현상도 포함한다. 특히 타인과의 분리는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자신의 전략적 자아가 규정하는 데로 타인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전략적 자아의 에너지원은 불안이다. 불안은 고통과 비슷해서 빨리 벗어나려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안전을 조작적으로 얻으려 하기에 결코 평화에 이를 수 없다. 평화는 내면에서 시작하고 이는 존재적 자아가 차지하는 공간이다. 그러니까 전략적 자아가 아무리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존재적 자아의 힘 없이는 이룰수 없는 것이다.
존재적 자아는 사랑이 에너지원이다. 사랑은 인정과 수용을 근간으로 한다. 사랑은 벗어나고자 하는 동기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그 속으로 더 들어가고자 한다. 존재적 자아는 내면에 천착하여 마음 속 깊이 들어간다. 불안을 떨쳐버리려고 갈팡질팡하며 혼란스러운 상황도 받아들이고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 인간의 모순과 역설을 인정한다. 세상의 긍정성과 부정성 모두를 포용할 수 있지만 부정성보단 긍정성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것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전략적 자아는 쉬운 길이다. 편하고 누구나 가는 넓은 길이다. 반면에 존재적 자아는 좁은 길이다. 협착하고 험해 찾는 자가 적다. 편한 길은 쉽게 선택할 수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보기 어렵다. 일시적으로 해소는 할 수 있지만 그건 해결이 아니다. 이는 마치 눈만 감으면 모든 상황이 지나갈 거라는 착각과 흡사하다. 어려운 길은 선택하기가 꺼려진다. 잘 되지 않아 좌절이 많고 혼란은 지속되며 쉽고 빠른 길에 대한 유혹을 잘 견뎌야 한다.
하지만 꼭 어렵고 쉬운 문제만은 아니다. 참과 거짓의 문제요, 빛과 어두움의 문제이기도 하다. 전략적 자아의 길은 결국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분열과 분리, 소외, 파멸에 이른다. 그 당시 상황을 잘 타개한 것 같지만 피상에 멈출 뿐이다.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으며 쉽게 타인이나 상황에 책임을 돌려 통제하고 조작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진리를 못보게 막는 거짓된 정보에 불과하다.
전략적 자아와 존재적 자아를 이분법으로 보면 위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어느 정도는 진실이다. 하지만 이내 곧 기술과 도구는 나쁜 것이고 이들을 되도록 안 써야 진정한 안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도구나 기술, 방법이 언제나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문명의 이기와 편리는 언제나 도구와 기술이 이끌었고 지금도 이는 여전히 사실이다. 기술과 도구가 없다면 원시시대로 회귀하고 말 것이다. 지금 내 생각을 적는 이 앱도 좋은 도구이다. 내가 글을 쓰는 것도 글쓰는 기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기술과 도구는 중립적이다.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 중립적인 것은 그 바탕에 선한 의도가 담겨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의도는 쉽고 빠른 길을 택하는 전략적 자아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내면을 파고 들어 더 깊은 철학적 깨달음을 만드는 존재적 자아가 사랑이라는 의도를 가질 때 기술과 도구는 잘 쓰일 수 있다.
우리 주변엔 기술이 너무도 많다. 생활 속 기술, 전문적 기술, 공부의 기술 뿐만 아니라 설득의 기술, 경청의 기술, 사랑의 기술 등 사람을 대할 때 사용하는 기술도 많고 그걸 소개하는 책도 많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들이 마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처럼 소개된다는 것이다.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는 비판적 안목은 없이 말이다. 또한 이런 책일수록 더 잘 팔린다. 값싼 자본주의의 실체를 보면서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우리에게는 전략적 자아보다 존재적 자아의 힘이 커야 한다. 피상적이고 단기적인 해결책에 매달려 좌고우면하는 모습에서 벗어나려면 말이다. 어떻게 하는가보다 왜 하는가에 집중해야 안목이 생기고 난 후에는 어떻게의 다양한 옵션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또한 타인의 전문가스러운 결정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가 스스로 판단하는 경험이 쌓여야 안목이 생길 수 있다. 이런 안목은 존재적 자아의 힘이 된다.
교육은 존재적 자아의 힘을 키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옳음에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전략적 자아는 존재적 자아에 종속되어야 한다. 즉, 존재적 자아의 방향과 결정에 맞춰야 한다. 깊은 생각을 통해 나온 기술, 전략, 방법은 그 생각을 이상에 머물게 두지 않고 현실로 끌어내린다. 생각은 많지만 어떻게 할 지 모르는 것보다 생각과 방법 모두를 갖고 있는 게 훨씬 낫다. 그런 사람의 비판적 안목은 가치 있는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실천적 힘을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 중에 어떤 것이 먼저냐 하면 존재적 자아가 먼저다. 둘이 같이 갈 수는 없다. 그런 식의 접근은 물타기와 같다. 철학과 기술은 양립할 수는 있어도 함께 배우는 건 철학적 사고가 어느 정도 바탕이 된 후에나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선 철학은 어렵고 기술은 쉬워 기술로만 몰려들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교육에서 철학을 하려면 자기 성찰이 필수다. 그런 후에 다양한 생각을 나누고 더 깊은 질문을 통해 사고의 폭을 넓히거나 기존 틀을 깨는 작업이 뒤따라온다. 그렇게 자기
생각을 만든 후에 다양한 기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자기에게 맞는 것을 고르게 한다. 거기에 덧붙여 기술을 사용하는 예를 보면서 그 속에 감추어진 철학을 들추어내는 작업도 필요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중에는 존재적 자아와 전략적 자아는 통합될 것이다. 분열되지 않고 통합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질일진대 교육은 그 본질을 만들어가는 작업이라 정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