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가르침과 배움으로 바라보는 시각에는 경제성에 대한 이슈가 언제나 들어 있다. 투입과 산출의 과정으로 바라보면서 가능한 적게 투입하여 가능한 많이 산출해야 한다는 최대 이익 실현의 관점이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이익은 정보의 파지, 적용 및 생산과 관련된 능력과 태도의 배양이 주를 이루고 있다.
브루너의 지식의 구조 안에는 학생들이 지식의 최전선에 있는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가능한 핵심을 파악하고 익히면 학자처럼 될 수 있다는 점에 경제성의 원리가 들어 있다. 그가 피아제의 발달 단계에 맞춰 학습 내용을 선정하거나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와 직관적 사고 및 학습동기를 언급하는 이유 안에도 경제적 시간의 개념이 들어 있다. 그 배경에는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로 인한 충격이 그동안의 미국 교육을 안일함이라는 틀로 바라보게 했고 결국 소련과 경쟁 관계에 있던 미국을 빠른 시일 내에 과학 대국으로 발전시키려는 조급함이 작용했다고 본다. 그래서 국가 교육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가 필요했고 브루너는 지식의 구조라는 핵심을 잘 가르치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지식의 구조가 각광받았던 이유는 경제성의 원리를 잘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은 억지로 집어넣을 수는 없는 것이기에 발견의 기쁨과 여러 차례 걸쳐 심화된 형태로 나타나는 나선형 교육과정이 함께 나온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우리 학교 교육은 많은 지식을 짧은 시간에 가르쳐서 방대한 지식을 갖는 엘리트주의가 팽배해 있다. 하지만 소위 백과사전적 지식 안에는 암기와 얕은 이해에 그칠 정도의 경제성만 들어 있다. 해당 이후 급속도의 경제 성장이 그 배경으로 작용한 것이다. 게다가 시험 성적은 교육의 경제적 효과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표가 되었다. 선발 중심의 체제가 공정성을 무기로 모든 교육체제를 집어 삼켰기 때문이다. 교육이 더 나은 경제적 생활을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면서 지식의 신비함과 위대함은 사라지고 경제의 종속적 지위로 전락하게 되었다. 학교 수업이 교사와 학생의 긴장과 갈등의 연속으로 점철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지식을 소유하면 다양한 분야로 뻗어나가거나 여러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는 지식의 경제성을 높이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 미래 사회에 필요한 역량을 키우는 목적을 가진 역량 중심 교육과정은 지식의 경제성을 높일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이 될 것이다. 작금의 교육이 미래를 살아갈 능력을 키울 수 없음은 자명해 보인다. 이것은 지식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취하면서 객관주의적 지식관을 무너뜨리고 지식의 경제성을 가치보다 우위에 둘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어긋나는 지식들은 소멸하고 대부분의 지식들은 컴퓨터에 의해 통제될 것이다. 오직 창의력을 갖고 새로운 관점을 취할 줄 아는 소수에 의해 새로운 지식이 생겨날 것이다.
결국 지식의 경제성을 높이는 것이 엘리트주의를 막지는 못한다. 교육을 지식중심의 길에서 방향 전환해야 하는 이유이다. 지금 여기서의 삶을 신체적, 정신적, 영적 차원에서 풍요롭게 만들 능력을 키워주는 것으로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지식이 무용지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지식이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가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지식의 소유보다는 지식에 접근하는 과정과 태도가 더 중요하다. 지식에 접근하면서 타인과 환경, 그리고 자신과의 소통이 요구되며 그것은 다시 자신과 타인, 환경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기반이 되고 결국 모두를 성장 및 발전시킬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지식은 타인 및 환경의 또 다른 지식과 만나고 결합되어 새로운 생성으로 이어진다. 경제적 지식이 아니라 관계적 지식이 되는 것이며 사적 지식과 공적 지식의 만남과 교차는 인간의 삶에 풍요로움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회로 변화하는 원동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