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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vid Kwon May 05. 2020

한번 사는 인생,
뻔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일상에서...]

"한번 사는 인생, 뻔하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페이스북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한 영어 교육 프로그램의 광고 문구가 귀에 맴돌았다. 

요즘 들어 가장 고민하는 주제다. 


뻔한 인생, 그리고 뻔하지 않은 인생...

나도 그랬다. 뻔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잘난 것도 없으면서. 아니 잘난 것과는 다른 것이라 생각했다.  


뻔하다는 표현이 어색했다. 사전적 의미가 궁금했다. 

"어두운 가운데 밝은 빛이 비치어 조금 훤하다. '번하다'보다 센 느낌을 준다."


그리고 두 번째 의미는 이렇다. 

어떤 일의 결과나 상태 따위가 훤하게 들여다 보이듯이 분명하다.  


일상적으로 자주 쓰이는 표현은 아마도 두 번째 의미가 맞는 듯 하다. 


인생을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할 때, 40이 넘은 지금은 약 절반을 살아온 셈이다. 

쉽지 않았지만, 고비도 있었지만, 누군가 이야기하듯 죽도록 힘든 삶도 아니었다. 

감사할 법도 한데... 요즘 느끼는 이 감정은 좀처럼 주체하기가 어렵다. 

삶을 살면 살수록,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인생이 뻔해지는 것 같은 느낌... 

 

일, 집, 잠깐의 휴식, 그리고 다시 일, 육아...

아내와 아이들의 웃음을 보면서 잊었던 생각들이 홀로 있을 때면 스멀스멀 올라온다. 

평범한 일상이 주는 감사함을 그새 잊은 걸까.  


현실 속 내 모습에 대한 불만족. 원하는 방향이 아닌 곳으로 럭비공처럼 튀는 인생. 

10여년 간 해온 일도 지금은 나에게 잘 맞는지 모르겠고, 이름 뒤에 달린 직함도 어색하다. 직함에 맞는 일을 하는 건지도. 


"누군가는 '소명'이라는 것을 갖고 살아가던데...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이게 아닌데...

더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는데..."


"이게 다야? 내 삶이 이게 다야?"


답답함에 목사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요즘 딱 죽고 싶다. 인생이 이게 다인가 싶다. 뭐 극적인 성공도 없고, 성취감도 없고, 의미도 없는 것 같고..."

"넌 그게 이제 왔냐?"


궁금했다. 친구의 스토리가.  


"넌 언제 그랬는데?"

"난 한참 됐다. 현실의 답답함과 갈증이 해소가 안되는 느낌."

"목사로 말고, 친구로 조언해봐."

"대학원을 마치고 다시 지금 사역지로 왔는데, 딱 그 느낌이 드는거야. 탈출구가 안보이는 거지. 도망가고 싶기도 하고, 휙 사라지고 싶기도 하고..."


"어떻게 이겨냈냐?"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삶을 확 뒤집는거지. 이를테면 직장을 관두고, 다른 직업을 얻는다던가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간다던가..." 

"현실성이 없다. 다른 하나는?"

"내가 선택한 방법인데, '소확행'이야. 소소한 걸 통해서 니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찾는거지. 나는 커피에도 빠져보고, 꼭 시간을 내서 가까운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보기도 해. 아니면 내가 가고 싶은 영국의 한 지역을 막 인터넷으로 찾아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혼자 실실 거리고."


더 답답해졌다. 

"시간낭비 아닌가. 현실은 똑같잖아?"

"똑같지. 그런데 생각해봐. 답답해한다고 해서 니 월급이 갑자기 두 배로 오르지도 않을꺼고. 갑자기 초일류 기업으로 스카웃될 일도 없을거고, 일확천금이 손에 쥐어지지도 않을꺼고..."

"그건 맞지."

"그런데 소소한 걸 해봤더니 재미도 있고 숨이 쉬어지더라. 커피 맛도 잘 모르지만 원두를 고르고, 향에 취해도 보고... 그랬더니 생각이 한결 가벼워지고, 답답한 게 나아지더라."

"....."

"너도 한번 찾아봐. 뭐가 있을꺼야. 뭐라도 있을꺼야." 


곰곰이 생각해보니, 주변엔 이 '무엇'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한 지인은 취미가 '마니아' 수준이다. 몇년 전에는 마라톤에 빠져서 시카고에서 열리는 대회에 다녀오더니, 가족과함께 첼로와 피아노를 배우기도 하고. 

최근엔 헬스와 테니스에 빠져서 쉬는 날이면 운동에 정신이 없다가, 이제 유튜브 영상 제작에 재미가 들렸다. 게재한 영상이 순식간에 구독자가 붙으니 퍽 재미있어하는 모양이다. 


또 다른 지인은 집에 커다란 어항을 들여다놓고 매일 물고기를 들여다본다. 가만히 앉아서 인사를 나누기도 하는 것 같다. 또 물고기를 키우는 사람들끼리 모임에 나간다고 한다. 뒷 마당에는 레몬 씨앗을 심고 있다고도 했다. 


그들은 '행위'를 통해 삶의 공허한 부분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의미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그 행위가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갈지언정... 


'나에겐 뭐가 있지?'

딱히 생각해보면 난 '취미'가 없다. 취미는 사치다. 아니다 지금껏 사치라고 생각했다. 

성과를 내는 일. 이를테면 돈을 벌고, 학위를 취득하고, 어떤 의미있는 성과물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면 '시간 낭비'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돌아보니 지금은 '나'라는 색을 지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뻔하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김질 했다. 뭐가 뻔하다는 건지 의미를 곱씹으니 '성공'에 대한 기준에서 내 인생이 뻔하다는 것으로 들렸다. 내 기준으로 성공하지 못했으니 인생이 뻔하게 느껴진 것이다.   


부유하게 자라진 않았지만 부족하게 자라지도 않았다. 그래서 돈은 쓸 만큼만 있으면 된다고 믿었다. 쓸만큼 이라는 돈이 어느정도 인지도 몰랐으면서... 


마흔 정도가 되면, 자신있게 누군가에게 밥을 사고, 해외 출장을 다니면서 한 분야의 '전문가' 스러운 제법 그럴듯한 삶을 살고 있을 줄 알았다. 


현실은 평범한 직장생활, 즐거운 지옥같은 육아, 조금 부족한 듯한 재정. 그리고 '갑툭튀'하는 어쩌면 정해져있으나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일련의 사건 사고들을 해결하고 산다.   


반대로 뻔하지 않은 삶을 상상해봤다. 

심심하면 차를 새것으로 바꾸고, 일년에 한 두달은 휴가로 보내고, 휴가 때면 유럽으로, 남미로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여행을 다니고. 이쪽 저쪽에서 수억원대의 연봉에 스카웃 요청을 받고...   


남들이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성공'에 기준을 맞추니 인생이 뻔해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기준이 틀어져서, 생각이 틀어졌던 것일까.  


그저 '풍요롭게 보이는 삶', '누군가에 인정받는 성공한 삶'에 머물러 삶 속에 함축되어 있는 '콘텐츠'를 모두 무시하고 있었다. 열매의 알맹이는 쏙 빼고 껍데기만 핥고 있는 양... 


인생은 뻔하다. 태어나서 죽음으로 향해 가니까.

인생 안에 담긴 '알맹이'는 뻔하지 않다. 단 한번의 똑같은 삶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인생 안의 '콘텐츠'의 재미, 감동, 그리고 다채로움은 만드는 사람의 몫이다.


누군가 한 말이 생각난다. 

"너한테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 다들 자기 살기 바쁘지."

그저 내 삶을 살면 될 것을. 


짜장면을 먹으면서 해맑게 웃는 딸아이의 얼굴은 

퇴근길에 나에게 달려와 안기는 첫째의 무게감은 

누군가에게는 기적이다. 


미국에서의 심심한, 어쩌면 전원스러운 삶이

삶의 고단함에 찌든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갈구하던 휴식이다. 


경험하는 매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면 

그 순간은 스토리가 되고 콘텐츠가 된다. 


"뻔한 인생은 없다. 누구에게나 스토리는 있다."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쓰다보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누군가 답글로 '공감'이라는 표시라도 해준다면 조금 힘을 얻을 것 같아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글은 복잡한 생각에 쉼을 가져다 준 분출구가 됐다. 


친구의 말처럼 내가 숨쉴 수 있는 그 '무엇'은 있을까.   


글을 쓰는 동안 가수 '적재'가 부른 '별 보러 가자'라는 노래가 스르르 귀에 감긴다. 영상으로 보이는 해질 무렵 유럽의 풍경과 사람들의 시선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연인과 함께 추운 겨울 맞잡은 손을 코트 한쪽 주머니에 넣고 걸었던 거리의 리어카에서 들었던 그 노래처럼.

 

오랜만에 몸을 좌우로 슬며시 흔들어도 본다. 혹시라도 아내가 자다 일어나서 이상한 내 모습에 놀랄까봐 조금은 소심하게.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너희 집 앞으로 잠깐 나올래?

가볍게 겉옷하나 걸치고서 나오면 돼.


너무 멀리 가지 않을께

그치만 니 손을 꼭 잡을래

멋진 별자리 이름은 모르지만, 나와 같이 가줄래. 


https://www.youtube.com/watch?v=arUlhs2-4Rk


음악 안에서 과거의 어느 시점, 그 냄새, 그 기분으로 빠져본다. 내 숨 쉬는 공간은 이곳일까. 


페이스북을 통해 간간이 소식을 들어 온 한국의 친구 부부가 드디어 아이를 가졌다고 연락을 해왔다.  

유산의 아픔을 겪었던 친구. 

기쁘고, 불안하고, 긴장되고 그렇겠지...


친구 부부도 

목회의 길을 걷는 친구도 

 

그리고 나도 

삶 속에서 여러 감정과 감상, 그리고 스토리가 뒤섞여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콘텐츠는 만들어지고 있다.  


그래서 난 뻔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속으로 되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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