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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옥 Dec 30. 2020

새끼 꼬던 저녁에

사드락 쓱쓱 사드락 쓱쓱




 베란다를 정리하다 작은 똬리를 발견했다. 그 똬리는 어느 해 김장 무렵, 아버지를 그리며 새끼를 꼬아 버리지 못하고 베란다 선반 위에 올려놓았던 새끼줄이었다. 날씨가 서서히 추워질 무렵 김치를 담그기 위해 쪽파와 함께 총각무를 배달시켰다. 배달된 총각무를 보며 단을 묶은 푸짐한 짚에 눈이 갔다. 촉촉하게 물이 축여 져서 새끼를 꼬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일부러 구하기 힘든 짚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 축축한 지푸라기에서 겨울밤을 수놓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방바닥에 아버지처럼 털버덕 앉아 사드락 쓱쓱 사드락 쓱쓱 지푸라기로 묘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신촌의 작은 마을에 산 그림자가 내려온다. 여러 폭의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봉우리는 부드럽게 내려앉는 어둠에 감싸여 보이지 않는다. 동지섣달 하루해는 짧기만 하고. 집마다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워 오르고 새들도 제집을 찾은 듯 고요하다. 저녁밥을 먹을 시간, 연기가 잦아든 부엌에서는 구미 당기는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엄마의 부드러운 식사 종소리에 아버지 주위로 식구들이 앉은뱅이 밥상에 올망졸망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녁 메뉴는 무를 채 썰어 가마솥에 장작불 때서 지은 무밥이다. 어느 그림책에서 '잠잠이'는 일을 하지 않고 빛을 모은다. 빛이 없는 겨울, 들쥐들에게 갖가지 색깔 이야기를 나누어 따듯한 겨울을 보내게 했다. 잠잠이가 빛을 저장했듯이 김장 무렵 땅속에 저장해 둔 무로 우리 가족이 먹을 무밥이 마련된 것이다. 양념간장에 쓱쓱 비벼 된장찌개 곁들인 달짝지근한 무밥은 소박하지만 배를 든든하게 했다. 온 가족이 모인 가운데 흐뭇하게 저녁 식사를 마친 아버지는 밥상이 물러나고 나니 새끼를 꼬기 위해서 따뜻한 온돌방 윗목에 앉았다.     


  새끼를 꼬기 위해서는 벼를 타작하고 난 짚을 손질하는 게 우선이다. 쌓아 놓았던 짚벼늘에서 한 다발 꺼내 마당에 펼쳐놓고 짚의 아랫부분을 메겡이로 골고루 내리쳤다. 여러 번 쳐서 부드럽게 만든다. 부드러워진 짚을 아버지의 갈퀴만 한 큰 손은 검불을 말끔히 떼어 내고 속대만 남긴다. 헝클어진 머리 빗질해 놓은 것처럼 단정해진다. 하루 저녁에 새끼를 꼴 수 있는 만큼의 짚에 물을 축여 세워 둔다. 물기를 머금어 부드러워지면 새끼를 꼬기 위해 방으로 옮긴 후 아버지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새끼꼴 준비를 한다. 지푸라기 대여섯 개 집어 반으로 나눈 후. 짚을 양 손바닥에 놓고 꽈배기 꼬듯 비벼 올라간다. 꽈배기 모양의 새끼줄이 눈앞에서 너울거린다. 너울거림이 멈추면 거미가 뒤꽁무니로 줄을 뽑아내듯 아버지는 한쪽 엉덩이를 살짝 들어 뒤로 밀어내기를 수도 없이 반복한다.     


  새끼 꼬는 방은 못에 옷가지가 걸려 있고 옆으로 사진 액자가 몇 개 걸려 있다. 그 벽 끄트머리에 걸린 괘종시계의 흔들 추 소리가 새끼 꼬는 소리와 어우러지고 있었다. 어느덧 시간을 알리는 시계의 종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고 산촌의 겨울밤은 깊어만 갔다. 그 시간 해가 짧아져 일찍 시작한 저녁식사에 배가 굴 풋 해졌다. 어머니도 느끼셨는지 아버지 옆에서 콩을 고르던 어머니가 일어서더니. 장독대 항아리에 짚을 깔고 저장해 두었던 홍시를 꺼내 왔다. 아버지 옆에 옹기종기 앉아 살얼음 살짝 얼은 몰캉한 홍시를 입으로 쭉 빨아들인다. 혀에 느껴지는 그 단맛! 가을에 딱딱하고 떫었던 감이 어찌 이리 잘 숙성이 되었을까? 인공을 가미하지 않은 이 단맛을 어디에 비할 수 있으랴. 다디단 감과 아궁이에서 꺼내 온 군고구마를 먹다 보면 지푸라기에 물기가 마른다. 분무기가 귀했던 시절이다. 어머니는 양푼에 떠다 놓은 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어 지푸라기에 내 뿜었다. 아버지 새끼 꼬는 옆에서 어머니가 콩을 고르고 있고 우리는 방안의 달콤한 분위기에 휩싸여 뒹굴거리며 놀고 있었다. 이때 어머니의 물 뿜는 모습이 재미나 보였다. 우리는 물을 입에 머금고 ‘푸푸’ 서로 내뿜으려고 하다가 물을 바닥에 엎질러 꼬아놓은 새끼가 흥건하게 젖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아버지의 넓은 엉덩이를 통과한 새끼줄이 뒤에 큰 뱀 한 마리 똬리 틀고 있었다. 짚 한 단이 어느새 새끼줄로 변신한 것이었다. 그즈음 밖에는 소리 없이 눈이 내려 토방의 댓돌과 낮은 마루 위로 습자지처럼 눈이 쌓였다. 백석 시인의 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라는 시 한 구절이 되뇌어지는 그윽한 저녁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자라고 있었다는 마당 한쪽에 서 있는 감나무에 쌓인 눈도 달빛으로 순백의 정취를 더했다. 개가 짖어대던 소리도 잦아든 작은 마을에 정적이 일었다. 사방이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시간, 한 줄기 바람은 감나무에 쌓인 눈을 덜어내고  있었다. 짜르르하고 신우대 잎에 일렁이는 바람 소리와 사드락 새끼 꼬는 소리의 화음은 정적인 산촌의 겨울밤에 운치를 더했다. 드디어 새끼가 다 꼬아지면 아버지는 발을 앞으로 쭉 뻗어 새끼줄을 둥그렇게 감아 큰 타래를 만들며 흡족해하는 표정이었다. 농한기에 사용하려면 네댓 개의 타래를 만들어 놓아야만 일 년 농사를 지을 때 사용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장만한 논은 산 하나를 넘어야만 하는 ‘천치’라는 곳에 있었다. 걸어서 한 시간도 더 걸리는 곳이었다. 막걸리 한 주전자와 새참을 보자기에 싸 들고 산을 넘을 때면 대낮인데도 어찌 그리 무서웠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가끔 꿈속에서 산길을 걷는 어린 소녀를 만나곤 한다. 산에 나 있는 오솔길을 잔뜩 긴장해서 걷는 꿈을 꾸다가 깬다. 어른이 된 지금 다시 그 길을 걷고 싶어지곤 한다.      


  가을 추수 때가 되면 낫으로 벼를 베어서 다랑논 바닥에 나란히 펼쳐놓는다. 벼가 마르면 한 번 뒤집어 준 후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아서 잘 마르면 바로 묶어서 낟가리를 해 놓는다. 낟가리에 바람이 많이 놀다 가서 볏단에 물기가 없어지면 그때서야 집 마당으로 옮겨진다. 벼를 나르는 교통수단이 없었기에 지게에 볏단을 얹어 산길로 날라야 했다. 그 많은 볏단을 어떻게 다 날랐을지 아버지의 농사짓던 시절이 아득하고 지게 진 아버지 모습이 어른거리며 짠하기만 하다.     


  마당까지 날라진 볏단은 동네 아낙들과 품앗이로 벼훑이인 홀태 질을 해서 낟알을 얻었다. 마당에 덕석을 깔고 동그랗게 설치된 여러 개의 홀테 밑으로 아낙들의 잘 익은 구수한 이야기가 흘러내렸다. 이야기를 가득 먹어 무끈해진 나락이 멍석에 수북하게 떨어져 쌓였다. 갈퀴로 검불은 걷어내고 당그래로 나락을 가운데로 모아 가마니에 퍼 담았다. 아낙들의 바쁜 손놀림으로 홀테를 통과한 지푸라기가 옆에 수북하게 놓여진다. 아버지는 지푸라기 한 줌을 두 개로 나눠 끝을 묶어 끈을 만들어서 한 다발씩 묶어내느라 바빴다. 단이 묶어지면 짚벼늘을 만들어 쌓아 놓았다. 나락을 얻기까지 몇 공정을 거쳐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몇 과정 아니, 거의 모든 과정을 건너뛰고 기계로 타작을 한다. 논에서 벼 타작이 바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느리고 지난했지만 나락을 얻기 위하는 과정에서 정성이 있었고, 오가는 정이 있었으며, 땀방울의 인내와 감사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논에서 직접 타작하여 지푸라기가 커다란 둥근 뭉치로 보관되기 때문에 전처럼 온전한 지푸라기는 구하기 힘들다.


  지금은 농촌에서 새끼줄을 거의 안 쓰고 있지만 그 시절에는 새끼줄이 농가에서 아주 귀한 도구였다. 콩대, 깨대, 고춧대, 땔나무 등을 묶어야 할 게 많았다. 이는 아버지가 저녁마다 새끼를 꼬아 타래를 하나둘씩 곳간에 쌓아 두는 이유였다. 농사철에 사용할 만큼의 새끼줄이 거의 꼬아지질 때면 씨앗을 뿌릴 봄은 가까워진다. 이때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는 농한기에 풀어놓았던 신발 끈을 다시 동여매며 농사 준비를 한다.

     

  아버지의 세월 속에 고스란히 담긴 새끼 꼬는 영상은 내게 영원한 기억의 통로이다. 올겨울에도 새끼 꼬기에 적당한 짚을 만나면 묵묵히 농부의 길을 걸으셨던 아버지를 그리며 또 새끼를 꼬고 있는 나를 볼 것이다. 윗목에 앉아 새끼 꼬던 우직한 아버지 손이 떠오른다. 먼 시간을 지나 온 지금 그 저녁이 그립고, 함께 했던 가족들이 그립다. 아버지 새끼 꼬던 소리 정겹게 다시 들려온다. 사드락 쓱쓱 사드락 쓱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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