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첫 번째 우리 집
우리 집
어린 시절 네 번의 이사 기억이 있는데 아빠의 말로는 그전에 이사한 것까지 합치면 열 번은 넘게 이사를 했다고 한다. 그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과 또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흐릿하지만 생생하게 기억이 남는 집들은 5~6살 이후의 집들이다. 이 집들의 구조, 그때의 환경,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글이다.
기억의 첫 번째 집의 구조
마을 입구에서 오른쪽엔 마을을 지키는 큰 버드나무가 왼쪽 언덕진 곳엔 우리 집이 있었다. 회색의 큰 대문을 열면 넓은 마당이 있고 오른쪽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오픈형 창고와 각종 농기구, 지푸라기가 있었으며 왼쪽에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작은 창고가 있었다. 마당을 지나 앞을 보면 한옥은 아니지만 한옥의 구조를 가진 집이 있었다. 시멘트로 만든 돌계단과 그 위의 마루 그리고 몇 개의 방들 이곳은 구경해 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 우리 집은 이 집에 붙어있는 8평 남짓한 작은 집이었다. 문 앞에서 신발을 벗고 회색 양철문을 열면 바로 부엌이 보였다. 오른쪽엔 싱크대 왼쪽엔 방문. 부엌과 방문의 단차가 성인 무릎 높이만큼 되어 방문에 걸터앉아 부엌에 있는 엄마와 대화할 수 있었다. 방문은 창틀 형태의 나무와 유리로 된 미닫이 문이었으며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방이 있다.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에는 브라운관 TV가 있고 벽에는 온통 말린 꽃다발이 있다. 이 작은 공간에서 네 가족이 함께 살았다. 화장실은 집 밖을 나가 왼쪽으로 꺾으면 바로 오른쪽에 시멘트 벽돌로 만들어진 푸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그래서 방에 요강을 놓고 생활했다. 씻는 곳은 화장실을 지나 오른쪽에 수돗가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빨래도 하고 씻기도 했다.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아 추운 날에는 물을 끓여서 사용했다.
마당에 얽힌 이야기
큰 집 왼쪽에 불을 피우던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서 동생과 함께 불장난을 하기도 했는데 온갖 쓰레기를 주워 태우다 플라스틱이 녹아서 흐물거리는 것을 보고 나뭇가지로 만지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러다 나뭇가지로 녹은 플라스틱을 들어 동생이 자랑을 하다가 그만 엄지발가락에 플라스틱이 흘러내려 데고 말았다. 동생의 우는 소리에 엄마는 놀라 동생을 챙기고 그 와중에 흐물흐물한 큰 플라스틱을 건져낸 동생이 부러웠던 나는 같은 장난을 치다 엄마에게 걸려 동생이 다친 걸 보고도 그러냐며 혼이 났다.
어느 날 화장실의 구멍 난 외벽에 메추라기가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다. 엄마는 우리처럼 잠깐 여기에 와서 살고 있는 것이라며 알에 있는 새끼들이 놀라지 않게 괴롭히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미새와 알을 며칠 지켜보다가 알 하나를 집어 깨었다. 알을 깨니 노른자와 흰자가 나왔는데 이것을 보고 놀라 도망쳤다. 이 일은 새들을 신경 쓰고 있던 엄마와 아빠가 금방 알게 되었고 나는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꾸중을 들었다. 이 사건이 있고 새에게 사과를 하러 갔지만 이미 새와 알들은 사라져 있었다. 사실 이때 당시에 어미새는 둥지에 살고 아기 새들은 알에서 사는 줄 알았다. 며칠을 지켜보면서 아기새들은 왜 나오지 않는지 나처럼 부끄러움이 많은가 생각하고 알을 깬 것이다. 알을 깨면 아기 새가 나올 거라는 기대와 달리 끈적한 액체들이 나와 놀라 충격을 받고 도망친 것이었다. 아직도 이때를 생각하면 어미새와 아기새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우리 집에서는 엄마가 직접 미용을 해주었다. 이 날은 동생이 먼저 미용을 받았는데 발가벗은 채로 비닐을 덮고 시멘트 계단 턱에 앉아 머리를 빡빡 밀었다. 머리를 밀고 나서는 수돗가로 가 목욕을 했다. 먼저 머리를 민 동생은 수돗가에 가서 기다리고 엄마는 나에게 어차피 목욕을 할 것이니 비닐을 덮지 말고 그냥 밀자고 했다. 머리를 밀고 있는 도중 대문에서 나와 동생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대문이 스르륵 열렸다. 우리와 함께 놀자고 놀러 온 동네 여자 친구였는데 눈을 마주치고 깜짝 놀라 재빠르게 소중이를 가린 뒤 수돗가로 도망쳤다. 수돗가에서 만난 동생에게 사실을 말하니 나를 놀려 다투고 엄마에게는 왜 비닐을 안 덮고 머리를 밀었냐며 삐진 채로 목욕을 받았다. 놀러 온 여자 친구는 엄마가 잘 이야기해서 다음에 놀자며 돌려보냈다.
가을에 빨래를 하고 마당에 있는 빨랫줄에 빨래를 널어놓으면 고추잠자리들이 앉아 쉬던 모습이 생생하다. 마당에는 토끼와 강아지를 키웠는데 토끼는 데려온 지 얼마 안 되어서 한 마리는 강아지가 물어 죽이고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을 갔다고 한다. 그러다 강아지까지 사라졌는데 죽어서 집 앞에 묻어 주었다고 한다. 같은 동네에 살았던 외삼촌은 강아지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고 그거 잡아먹은 것이라며 나를 놀렸다. 엄마에게 따지듯 잡아먹었냐며 물어봤지만 엄마는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함께 강아지를 묻어 준 곳에 갔는데 집 앞은 노지 갈대밭이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동물의 뼛조각을 보고 엄마가 여기라며 여기 뼛조각도 있다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믿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도 외삼촌이 종종 놀렸는데 나는 무덤까지 보고 뼈까지 봤다고 반박을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토끼도 강아지도 외삼촌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마을. 동네에 관한 이야기
엄마는 꽃을 참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빠는 엄마에게 꽃 선물을 많이 했는데 그 덕분에 방 안의 벽은 꽃으로 가득했다. 가족끼리 나들이를 가면 엄마가 꽃으로 꽃반지와 꽃왕관을 만들어 주기도 하며 여러 꽃들의 꽃말이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와 동생은 예쁜 꽃을 보면 꺾어다 엄마에게 선물을 하곤 했는데 이 꽃 선물이 반복되고 동네에 있는 꽃들을 꺾어가다 보니 결국 엄마에게 민원이 들어왔다. 온 동네의 꽃을 애들이 다 꺾어 꽃들이 씨가 마르겠다며 주의를 주라는 말이었다. 그 후 엄마는 우리에게 꽃도 생명이며 함부로 꺾어선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렇게 꽃에 대한 소동은 마무리되었다.
외삼촌 집이 가까워 외삼촌 집과의 교류가 많았는데 함께 저녁을 먹는 것은 일상이었고 외삼촌 집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기도 하고 아궁이에서 개구리를 구워 먹고 군고구마를 먹었었다. 외할머니가 만들어주는 군고구마가 제일 맛있었고 개구리를 먹는다는 게 신기해 구경을 하다가 뒷다리를 먹었다. 외삼촌 집과 우리 집은 같은 동네에 있고 걸어서 3~5분밖에 걸리지 않아 혼자서도 자주 놀러 가고 자고 오기도 했다. 외삼촌 집에서는 나를 막내아들이라고 할 정도로 좋아했는데 내가 너무 잘 따르다 보니 엄마가 서운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종종 엄마 아빠가 삼장 일로 새벽 4~5시 정도엔 나가곤 했는데 그런 날이면 나와 동생은 외삼촌 집에서 자곤 했다. 하지만 동생은 엄마 아빠와 떨어져 자는 게 무서워 밤마다 울었는데 그때마다 외숙모가 달래주었다. 그래서 나는 밤에도 울지 않는 씩씩한 형아였고 동생은 겁 많은 쫄보였다.
마을에는 마을 축제가 열리곤 했는데 그중 가장 충격으로 남은 기억이 있다. 외삼촌 집 할머니 방에서 동생과 놀고 있었었는데 돼지를 잡는다는 소리에 뛰쳐나가 구경을 갔다. 그곳에는 경운기 위에 돼지를 눕혀놓고 도끼로 내려치고 있었다. 돼지 멱따는 소리를 그때 처음 들었다. 오지 말라는 어른들의 말과 발 밑에 흐르는 돼지의 피를 보고 다시 할머니 방으로 도망쳐 이불을 덮고 숨어 있었다. 그러다 숨이 답답해 이불속에서 나왔고 어른들이 할머니 방 창문을 통해 건네준 음식을 받아 맛있게 먹으며 TV를 봤다. 마을 축제가 한창이던 노인당을 가니 막걸리 냄새가 풀풀 풍겼고 나를 본 할머니가 음식을 더 챙겨 주었다. 돼지를 잡는 충격에도 불구하고 수육이 너무 맛있어 두 번은 더 먹었던 것 같다.
장례식 절차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마을에는 누군가 돌아가시면 꽃상여를 메고 돌아다녔던 기억이 있다. 꽃상여가 멈춰 서있을 때 구경하기도 하고 그 뒤 꽃상여 노래를 따라 부르다 한 소리 듣기도 했다. 그 뒤로 마을에 있던 공동묘지가 이전한다며 공동묘지를 다 파헤친 적이 있는데 그때 지금 가면 관을 볼 수 있다는 친척형의 말에 관을 구경하러 가기도 했다. 공동묘지였던 언덕을 올라가 보니 정말 오래된 관이 하나 있었고 그 안에 미라가 있다는 말에 관을 열어보려다가 실패했다. 그것이 진짜 관이 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관이었다면 그렇게 외부에 방치되어 있는 것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생김새가 관이다.) 그럼에도 나의 행동 들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없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았다. 친하지도 않은 무리의 친구 집에 가 어쩌다 케이크를 얻어먹은 동생이 나에게 케이크를 먹었다며 자랑을 했는데 그 말에 바로 그 친구 집으로 찾아가 케이크를 얻어먹었을 정도니 말이다. 그 집에서는 나를 보고 왜 왔냐는 듯 황당해했는데 당당하게 케이크를 달라고 했다. 그 친구는 싫다고 했는데 어떻게 한 입 얻어먹고 나왔다. 근데 진짜 맛있었다. 그 촉촉함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 외에도 온 동네 친구들 집을 다 놀러 다녀서 집의 구조 크기 환경들을 보고 우리 집이 안 좋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때문인지 무지개 끝에는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듣고 무지개가 뜨던 날 모종삽을 가지고 무지개 끝을 향해 무조건 걸어 간 적이 있다. 아무리 걸어가도 무지개는 멀리에 있었고 뛰어가도 멀리에 있었다. 결국 다른 마을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보물들을 선물하면 좋아할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져 슬퍼했었다.
이 외에도 두부와 묵을 만들고 새우젓을 가져다 트럭을 타고 판매하던 외삼촌을 따라다니기도 하고 백작소 아저씨를 따라다니며 과자를 얻어먹기도 하며 소독차 뒤를 따라다니던 기억들이 있다. 뒷 산에서 썰매를 타기도 하고 온 동네 친구들이 모여서 놀고 있다가 밥때가 되면 밥 먹으라며 부르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첫 번째 집과의 이별
이 집에서는 초등학교 2학년 정도까지 지냈다. 일곱 살 때 웅변 학원을 다니고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괴롭힘을 받은 흔적이 있어서 합기도도 다녔다. 웅변 학원은 어린이집처럼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처음 간 날 엄마가 보고 싶다며 하루 종일 책상에 엎드려 울었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를 들어가서는 뒤에 앉은 친구가 뒤에서 칼로 옷을 찢었다고 한다. 나는 그대로 돌아다녔고 옷을 본 엄마가 아빠와 이야기해서 합기도를 다니게 됐다. 동네에서는 당차게 돌아다니더니 학원과 초등학교를 다니면서는 아무 말도 못 하는 바보가 되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마을 입구를 지키던 나무가 사라지고 우리가 살던 집도 살 수 없게 되어 이사를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