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능력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능력, 그리고 믿는 능력.
호모 사피엔스는 보이지 않는 것을 떠올리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을 수 있다.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차원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떠올리는 것은 상상이다.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고, 의미를 부여하며, 다른 사람과 함께 공유하고 믿는 순간 상상을 현실 세계로 받아들인다.
돈은 존재하지 않는다. /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 법도, 신도, 가치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믿고, 그 믿음을 기반으로 호모 사피엔스는 행동한다. 이것이 호모사피엔스가 호모 종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이유였다.
여러 호모 종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호모 사피엔스만이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역시 도구를 만들고, 사냥을 계획하고, 환경을 예측했다. 네안데르탈인은 오히려 사피엔스보다 더 큰 뇌를 가지고 있었고, 불을 사용하고, 죽은 이를 매장하는 행동까지 보였다. 단순히 “지능”의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뇌의 능력 자체가 아니라, 그 능력이 어떻게 작동되었는지 시발점을 찾고 싶었다
인간의 뇌는 DNA에 의해 만들어진다. DNA는 유전자 발현이라는 과정을 통해 뉴런과 시냅스를 형성하고, 신경 네트워크의 구조를 만든다. 그리고 그 구조에서 전기적, 화학적 신호가 흐르며 생각과 감정, 행동이 만들어진다.
신경 네트워크 구조는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바뀐다. 학습을 통해 연결은 강화되고, 사용되지 않는 연결은 약해진다. 인간의 뇌는 태어날 때 완성된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계속 재구성되는 구조다.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신경 네트워크는 다음 세대로 이어질까?
개인의 뇌 구조 자체는 유전되지 않는다. 하지만 뇌를 구조화시키는 환경은 전달된다. 신경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방식은 학습된다. 언어, 문화, 사회, 관계, 생활 방식 등은 다음 세대에게 전달되며, 그 결과 다음 세대는 유사한 환경 속에서 반복된 경험은 유사한 방향의 신경 네트워크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신경 네트워크 구조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완전히 다른 현상이 발생한다. 이것을 임계점이라고 생각한다.
임계점 이전에는 경험이 개인과 소규모 집단 수준에서 제한적으로 전달되며, 장기적인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임계점을 넘는 순간, 경험은 문화로 전환된다. 문화는 다음 세대로 전달되고, 지식은 누적되기 시작한다.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순간 호모 사피엔스는 환경을 재구성하는 존재가 된다.
자연환경과 지역, 집단에 따라 각기 다른 삶의 양식이 형성되는 것은, 경험이 반복되고 축적되면서 문화로 전환된 결과이다. 예를 들어 사막에서는 터번을 쓰고, 더운 지역에서는 신체 노출이 많으며, 추운 지역에서는 동물의 가죽을 입는다. 이러한 의식주의 차이는 단순한 환경 적응이 아니라, 경험이 축적되어 문화로 고정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또 하나의 변화는 뇌와 문화가 서로를 강화하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더 많은 경험은 더 많은 연결을 만들고, 더 많은 연결은 더 복잡한 사고를 만들며, 그 사고는 더 정교한 문화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문화는 다시 다음 세대가 경험하게 되는 환경을 형성하고, 그 환경 속에서 신경 네트워크가 재구성된다.
이 구조는 멈추지 않는다. 계속해서 증폭된다. 이것을 자기 증폭 시스템이라고 한다.
여기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문장은 “다음 세대의 뇌를 형성한다”라는 표현이다. 이 문장은 생물학적 유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신경 네트워크는 환경과 경험을 통해 학습되고 재구성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해외 이민 1세대와 이후 세대를 관찰하면 이해할 수 있다. 이민 1세대의 신경 네트워크는 이민 이전 국가의 문화 환경에 최적화되어 있다. 반면, 이후 세대의 자녀들은 이민 온 국가의 문화 환경 속에서 성장하며, 그에 맞게 신경 네트워크가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즉, 이는 DNA의 변화가 아니라 환경과 경험에 따른 신경 네트워크 구조의 변화이며, 이러한 변화는 세대를 거치며 자기 증폭 시스템에 의해 점점 강화되고 확장된다.
[ 자기 증폭 시스템 ]
DNA -> 신경 네트워크 -> 경험 -> 상상력 -> 상징 언어 -> 공유된 믿음 -> 문화 -> 다음 세대 -> (반복)
네안데르탈과 호모 사피엔스를 다시 보면 차이는 명확해진다.
네안데르탈인은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집단 규모가 작았고, 교류가 제한적이었으며, 경험이 장기적으로 축적될 구조가 부족했다. 즉, 임계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반면 호모 사피엔스는 더 큰 집단을 형성했고, 더 많은 상호작용을 했으며, 경험을 공유하고 축적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리고 결국 임계점을 넘어 자기 증폭 시스템을 형성하게 된다.
네안데르탈의 경우, 집단 형성 규모와 집단 간 교류가 제한되어 경험이 충분히 축적되고 확산되지 못했다. 그 결과 문화는 존재했지만, 그것이 장기적으로 누적되고 확장되는 구조로 발전하지 못한 채 사라진 것이다. 상상력과 언어 능력 또한 존재했지만, 집단 간 공유와 확산을 통해 확장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만약 그들이 경험의 축적과 확산이 가능한 구조를 형성했더라면, 네안데르탈인은 사피엔스와 함께 공존하는 또 하나의 호모 종으로 남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호모 사피엔스에게 임계점을 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답을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그것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능력”에서 찾는다.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고, 상징으로 표현하며, 타인과 공유하고, 함께 믿는 것은 전혀 다른 능력이다. 이 능력이 생기는 순간, 인간은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현실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된다.
결국 호모 사피엔스가 호모 종의 유일 종이 된 이유는 강해서도, 더 빨라서도 아니다. 더 많이 생각했기 때문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뇌에서 시작되었지만 사회로 확장되었고 문화로 저장되었으며 세대를 넘어 증폭되었다.
나는 이것이 지금의 마지막 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존재하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라고 생각한다.
문득 이 글을 작성하는 동안 나에게 스치는 또 한의 단어가 있다.
경험 vs 학습
뇌에게 경험과 학습은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뇌과학에서 경험은 외부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신경 네트워크에 변화를 일으키는 입력이며, 학습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신경 연결이 강화되거나 재구성되는 과정이다. 즉, 경험은 변화를 유발하는 원인이고, 학습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신경 구조의 변화라고 한다.
경험 → 학습 → 뇌 변화를 통해 호모 사피엔스는 경험을 통해 학습하고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존재이다.
AI 시대에 호모 사피엔스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연환경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형성된 지능과 AI와의 공존을 바탕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학습하고, 사회를 재구성하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할 시점이다.
지금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경험과 학습 중 무엇을 제시해야 할까?
선문답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지속 가능한 호모 사피엔스 종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는 끊임없는 경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