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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May 03. 2023

집세 협상은 처음인데요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면 집에 있는 모든 블라인드를 올리고 창문을 살짝 열어둔다. 노트북 전원을 켜고 드립포트에 물을 올린 후 원두를 꺼내 수동 그라인더에 넣고 원두를 천천히 갈기 시작한다. 머그컵엔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잔이 적당히 따뜻해졌다 싶으면 필터를 올리고 곱게 갈린 원두를 드리퍼로 옮겨 30초간 뜸을 들인다. 그리고 드립포트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그리고 다시 한 바퀴를 반복하면 그날의 커피가 완성된다. 창밖으로 보이는 녹색 뷰를 보며 커피 한 잔을 들고 테이블에 앉으면 그날의 출근준비가 완료된다. 이제 일을 시작해 볼까.


얼마 전에는 현재 살고 있는 집의 렌트 계약을 연장했다. 현재 살고 있는 곳의 만족도가 꽤 높았고 큰 이변이 없는 한 렌트를 연장해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람대로 계약서에 사인을 하며 한숨을 놓을 수 있었다. 한동안 근심걱정 가득한 얼굴로 지냈던 이유는 렌트 비용 인상률이 너무 높으면 이사를 고려해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 말부터 시드니 렌트 인상률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고 그런 사실을 입증하듯 최근 계약을 갱신한 주변인들이 엄청난 액수를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한국이든 호주든 어디 나라에 살든 자가가 아닌 삶은 잔잔하고 지속적인 스트레스가 동반되는 건 마찬가지다.


집세가 오르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판데믹 기간 동안 빠져나간 학생과 워킹 홀리데이, 외국인들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고 재택근무를 위해 시내와 약간 거리가 있더라도 조금 더 넓은 공간을 선호하던 사람들이 다시 출근하는 삶을 시작하게 되자 시드니의 렌트가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가 됐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그리고 이렇게 큰 폭으로 오를 거란 예상을 하진 못했다.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단 말이에요.


얼마 전, 아침 일찍 부동산 에이전시에서 이메일이 도착했다. 새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에 올 것이 왔다는 예감이 들었다. 역시나 현재 사는 곳의 계약을 연장할 생각이 있는지를 물었고 계약 갱신 의사를 표했더니 얼마 안 있어 렌트 비용 인상 통보가 도착했다. 역시나. 그래도 소문으로만 듣던 것보단 합당한 조정폭이었단 게 그나마 다행인 점이었다. 내용을 확인하고 알겠다고 간단하게 이메일 답장을 쓰려다가 잠깐 생각을 해봤다. 그래도 조금 조정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일인생활인으로 살면서 깨달은 건 고정비를 줄이는 게 가장 큰 절약이란 깨달음이었다. 작은 비용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매주 혹은 매달 빠져나가고 그 금액을 일 년 단위로 환산해 보면 생각보다 적지 않은 금액에 당황해 본 기억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지출을 줄이기 위해 갑자기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되는 것보다 일단 고정비를 점검해 보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서 보관함에 있던 이메일을 지우고 새로 이메일을 작성했다. 최대한 정중하고 간결하게 얼마나 지난 일여 년간 이 집에서 사는 것이 만족스러웠는지를 시작으로 현재의 상황과 부동산 시장을 설명하면서 약간의 협상을 제안했다. 안되면 그냥 저쪽에서 제안한 금액을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르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생각해 보니 일평생 집세협상 같은 건 해본 기억이 없었다.


업무 중에 계속 메일함을 클릭해 보며 에이전시의 답신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오후 다섯 시가 넘자 오늘은 답변이 안 오겠구나 싶었다. 거절이었다면 오히려 답변이 빨랐을 것 같은데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 중인 걸까 하고 내 멋대로 김칫국부터 마시기도 했다. 답메일은 역시나 다음 날 도착했다. 집주인이 내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는 말, 그래서 곧 새로운 계약서가 도착할 거란 내용의 이메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인상폭을 2% 정도를 낮췄는데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매주 나가는 금액이기 때문에 사실 적지 않은 금액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기 내서 보낸 제안이 받아들여져 기쁜 마음이 컸다. 점심시간에 계약서를 다시 한번 꼼꼼히 살피며 서명을 마쳤고 기쁜 마음에 에이전시 담당자에게 'You're the legend! I really appreciate it(님 정말 최고! 정말 감사합니다.)'하고 이메일을 보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나자 가슴깨에 얹혀있던 어떤 것이 마침내 스륵 하고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 나 집세 협상에 성공했어!


"엄마, 나 오스카 탔어!"라고 기쁨을 전하던 키호이콴처럼 "엄마! 나 집세 협상에 성공했어!"라고 자랑하고 싶었던 날


현재 살고 있는 스튜디오는 북동향(=한국 남동향)을 바라본다. 그래서 채광이 좋고 해가 떠있는 동안은 조명 없이도 생활이 가능하다. 집에는 빨래 건조대를 놓을 정도의 자그마한 발코니가 딸려있는데 이 발코니 덕분에 북동쪽으로 커다란 통창이 나있다. 아담한 평수에 비해 답답함을 느끼지 못하는 건 이 커다란 창과 창밖으로 보이는 뷰의 역할이 크다. 불편함이 없다고 하기엔 다음 이사에서 <이건 꼭!> 같은 리스트를 벌써부터 작성해 두었지만 아직까진 이 작고 아담한 집이 내 몸에 꼭 맞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일 년간 이사 계획은 없으니 현재 살고 있는 집에 또다시 한번 당부의 인사를 건네고 싶다. 앞으로 일 년 또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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