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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Aug 26. 2023

다음 생에 당신은 큰 개미핥기로 태어납니다

드라마 [브러쉬 업 라이프]

평소 잡다한 공상을 즐기는 편이지만 내세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다. 내세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가 크겠지만 만약에 내게도 다음 생이 주어진다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듯 인간을 삶을 상상하고 만다. 지구에 위치한 어느 나라, 어떤 성별, 어떤 인종, 어느 시대일 줄은 몰라도 마치 그렇게 기본값이라도 입력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번 생을 마치고 하늘나라에 갔더니 "다음 생에 당신은 큰 개미핥기로 태어납니다." 같은 대답을 들으면 기분이 어떨까? 큰 개미핥기라고요? 아니, 그것보다 제가 인간으로 못 태어난다고요?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이 일을 얼마 전에 간접체험 해 볼 수 있었다. 바로 일드 [브러쉬 업 라이프]를 통해서다.


주인공 콘도 아사미(안도 사쿠라 분)은 30대 공무원으로 시청에서 근무하며 비교적 별일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인물이다. 물론 창구에서 생떼를 쓰는 주민들과 짜증 나는 상사가 있지만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함께 상사 욕을 하고 저녁에는 오랜 동창들을 동네에서 만나 십 대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날도 절친 나치와 함께 미퐁의 생일을 축하하고 헤어지기 전, 편의점에 모여 나중에 더 나이가 들면 우리 셋이 다 같이 하이테크 양로원에 들어가면 되겠다 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깔깔 거린다. 십 대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들인 만큼 뭐든 척하면 척하고 알아듣는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웃음이 무색하게 미퐁, 나치와 헤어지고 얼마 안 있어 혼자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던 아사미는 그날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눈을 떠보니 주변이 온통 하얗다. 아사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말로만 듣던 하늘나라는 상상하고 있던 것과는 지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건조한 풍경과 공무원보다 더 사무적인 태도를 가진 직원 한 명과 함께 말이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힘든데 그 직원은 아사미에게 다음 생에는 과테말라에 사는 큰 개미핥기로 태어난다는 이야기를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해서 주인공을 더욱 절망하게 만든다. 친절하게 개미핥기의 사진까지 첨부해 주면서 말이다. 충격에 빠진 아사미는 자신이 왜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하는지(덕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혹시 다른 방법은 없는지 그에게 매달리듯 질문한다. 그리고 다른 인간으로 태어나는 건 불가능하지만 다행히 콘도 아사미로는 2회 차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답변을 듣게 된다. 그렇게 같은 인물로 2회 차 인생을 살기로 한 우리의 아사미는 안내대로 오른쪽 문을 통과해 다시 태어나게 된다. 같은 사람으로, 하지만 이전 생의 기억을 모두 간직한 채 말이다.


다시 한번 같은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누구나 바로 잡고 싶은 후회나 실수가 하나둘 쯤은 있을 것이다. 그때 공부를 조금 더 열심히 할걸이나 학창 시절에 조금 더 신나게 놀걸, 혹은 이십 대 초반에 연애를 더 많이 할걸 같은 아쉬움부터 엄마에게 화가 나서 던진 못된 말처럼 후회되는 일들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 커다란 사고를 막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큰 것이다. 이를테면 죽음 같은. 그렇게 2회 차 인생을 살게 된 아사미는 이런 것들을 하나씩 바로 잡아간다. 덕을 쌓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쓰레기를 부지런히 줍는 동시에 친구네 아버지의 불륜을 막고, 선생님을 위기에서 구해주고 할아버지가 건강하게 오래 사실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마침내 편의점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던 문제의 그날, 아사미는 다행스럽게도 죽음을 피하게 되지만 얼마 안 있어 또 다른 사고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이번 생에도 미타콩을 구출하고
어김없이 성인식 뒤풀이에 참가하는 우리의 아사미

같은 인생을 n회차 보게 되니 이 드라마는 무엇보다 조금씩 변주되는 디테일을 관찰하는 즐거움이 있다. 매번 비슷한 시점에 같은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때마다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 같은 디테일들이 조금씩 바뀌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성격이나 태도 같은 것들은 그 사람 고유의 것이다 보니 시점이 다를 뿐 결국 비슷한 말이나 행동을 반복하는 주변 캐릭터를 발견할 때면 그렇지, 그렇지 하고 익숙하고 즐거운 마음이 되고 만다. 하지만 반대로 매회차 어김없이 반복되는 씬도 있다. 성인식 뒤풀이에서 후쿠쨩은 오렌지 레인지의 나쁜 태양을, 카토는 코나유키를 어김없이 열창하는데 그렇다 보니 드라마 후반에는 두 노래가 무척 친숙해진다.


죽음과 환생이 반복되다 보니 주인공이 죽을 때마다 내세에는 또 무엇으로 태어날지, 그리고 이번에는 또 어떤 직업을 선택하는지를 보는 것도 이 드라마의 관점 포인트였다. 지난 생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다 보니 아사미는 자연스레 1회 차 인생보다 공부를 더 잘하게 되어서 선택지가 넓어지는데 그래서 매번 다른 직업을 갖고 그 직업이 무엇인지에 따라 좀 더 활발한 사람이 되었다가 차분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처음에 큰 개미핥기가 너무 강렬했다 보니 다음 생에는 또 무엇으로 태어날지도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건 직접 확인해 보시길. 개인적으로 웃긴 이야기를 웃음기 싹 빼고 이야기할 때 웃음이 터지고 마는데 그런 측면에선 결코 실망을 주지 않는 드라마였다.


마지막으로 일드를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는데 정말 오랜만에 즐겁고 유쾌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는 일본 드라마였다. 주인공은 삼십대지만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어린 시절이나 학창 시절의 비중도 크다 보니 등장하는 소품이나 소재, 노래, 드라마의 배경이 90년대인데 그래서 일본판 응답하라를 보는 기분도 들었다. 끊임없는 웃음 포인트와 후반부에는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반전도 기다리고 있으니 다들 각오 단단히 하고 이 드라마를 시작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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