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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Apr 27. 2024

열두 명만 모여도 작은 나라가 된다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 리뷰

여기 열두 명이 모인 작은 나라가 있다.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4점부터 11점까지 각자의 점수표와 함께 등장한다. 점수가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정치 성향, 페미니즘, 계급, 개방성, 이렇게 네 가지 항목에 대해 각각 1점부터 3점까지 출연자의 가치관에 따라 점수가 매겨진다. 그러니까 최저점은 각 항목이 1점씩 더해진 4점, 최고점은 12점까지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점수의 의미를 알고 나니 중도 성향을 가진 사람부터 꽤 뚜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쯤에서 이미 눈치 채신 분도 있겠지만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올해 1월 말부터 3월 초까지 웨이브에서 방영된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다. 4월 초에 한 팟캐스트를 통해 우연히 이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고 유튜브에 4회까지 풀버전이 올라와 있어서 그걸 다 시청한 후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결국 웨이브 구독을 시작했다. 마침 총선이 코앞이었기 때문에 이만큼 재밌는 프로그램이 없기도 했다.


4점부터 11점까지, 고르게 분포한 점수가 알려주듯 그곳에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출연자들이 등장한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가치관이 너무 달라서 말 한마디 섞고 싶지 않은 사람부터 어떻게 저 사람은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감탄을 하게 만드는 사람까지. 그런데 재밌는 건 첫인상과 달리 회차를 거듭하면서 비호감이었던 출연진이 서서히 호감이 되기도 하고 이 사람은 나랑 가치관이 거의 일치하는 것 같은데? 싶었던 사람이 비호감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가치관은 그 사람의 일부일 뿐 모든 것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더 커뮤니티]에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주구장창 거짓말만 하는 사람, 말만 번드르르하게 늘어놓는 사람, 끊임없이 논란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너무 투명하게 얄팍한 속내를 드러내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동시에 머리가 아픈 이유이기도 하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보니 회차를 거듭할수록 탈락자가 발생한다. 그래서 프로그램 제목과 같이 역시 사상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려나 했지만 때로는 생존을 위해 의외의 연합을 하는 경우도 생긴다. 생존하지 못하면 의견을 내고 그걸 토대로 어떤 합의점에 이른 커뮤니티에 더 이상 머무를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 소속의 백곰과 국민의힘 소속 슈퍼맨은 생존을 위해 초반에 연합 작전을 택한다. 딱 보기에도 가치관이 너무 다른 두 사람을 보고 저게 가능해? 했다가 오히려 정치에 몸 담고 있는 두 사람이 의견을 내고, 구성원들을 모으는 과정에서 굉장히 닮은 점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바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언어일까 하면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지만 [더 커뮤니티]가 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차별점을 두는 건 함께 힘을 합쳐서 탈락자 발생을 막을 수도 있고 최후의 생존자가 여러 명이 될 수 도 있다는 점이다. 출연자 테드는 시스템의 빈틈을 파고들어 어떻게든 탈락자를 최소화하려고 가장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모두의 생존을 위해 구성원들이 이렇게 머리를 맞댈 때 프로그램은 시시때때로 사실은 그들이 서로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상기시켜 준다. 어느 날은 갑자기 가장 존경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누구입니까? 같은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할 수 있는 질문에 대한 참가자들의 답변이 공개되기도 하고(누군가는 노태우라는 대답을 하기도 했다.) 어떤 날에는 5천만 원 이하부터 3억 원 이상 되는 출연진의 연봉이 공개되기도 한다. 하나씩 밝혀지는 사실과 함께 출연자들의 머리는 점점 복잡해지고 동시에 점점 궁지로 몰리는 그들을 시청자는 그야말로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된다. 생존이냐 탈락이냐 연합이냐 배신이냐. 과연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최근에는 가까운 사람들과도 공통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 점점 줄어든다. 예전에는 커다란 트렌드가 있어서 모두가 함께 그것을 보고 공유했다면 이제는 서로 구독하는 채널이 다르고 팔로우하는 사람들이 달라서 모두 각자의 세계를 유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이 주제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제일 핫한 것 같은데 친구에게 이야기하면 그게 뭔데 라는 답변이 돌아올 때가 그렇다. 게다가 이제는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보지 않는 게(=팔로우하지 않는 게) 너무 쉽다 보니 어떤 주제에 대해 반대 입장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들어본 게 언제인가 싶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마주했을 때 자연스럽게 뒤로 버튼을 누르거나 창을 닫아버리는 건 가장 쉬운 선택이다.


그래서 더 커뮤니티를 보는 게 힘들었다. 특히 초반에는 일부 출연진을 때문에 몇 차례 하차 위기를 겪었다. 퇴근하고 귀가해서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쉬기도 바쁜데 스트레스받는 걸 자처한다고? 처음에는 나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런데 회차를 거듭하다 보니 그 사람의 점수표가 아니라 어느 순간 그 사람 자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회당 1시간 30분, 총 11회. 어떤 사람에 대한 제법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에는 너무 편협하다고 느껴졌던 출연진에 대해 왜 저 사람이 저런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는지 맥락을 더듬고 조금은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만든다는 점이 이 프로그램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게다가 제작진이 만들어 놓은 설정과 여러 주제들이 스스로에게 던져봐도 충분히 좋은 것들이 많다.



10회 인생 스피치와 함께 가장 좋았던 6회 빈곤에 대한 하마의 이야기들

열두 명은 하나의 국가를 만들기에 충분한 숫자지만 한편으론 여전히 적은 인원수이기도 하다. 12명이다 보니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이 직접적으로 결과에 영향을 미치고 어떤 선택을 했는지도 바깥으로 잘 드러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래서 사회에서는 적당히 묻어가는 것으로 여러 순간을 넘길 수 있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몇몇의 출연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을 내뱉는다. '바깥에서라면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 대부분의 출연자들은 기득권이 기본값인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어느 순간 집단에서 소수자가 되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막연한 이미지로만 존재했던 사람들이 바로 내 옆에서 구체적인 존재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래서 이전이라면 쉽게 했을 선택을 주저하기도 하고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건 아마 출연자들 아니었을까. 상태는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 상황에 따라 그게 내가 아니었을 뿐 언제라도 그 당사자는 내가 될 수도 있다.


얼마 전 한 친구는 [더 커뮤니티: 사상검증구역] 하차 소식을 전했다. 잠깐만 봤는데도 스트레스를 받아서 이걸 계속해서 봐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서 다른 친구에게 카톡이 도착했다. 1회를 보고 순식간에 빠져들어 멈추지 못 하고 끝까지 다 봤다는 내용이었다. 예스, 영업 성공. 이 프로그램을 보는 동안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매년 연말에 하는 셀프 시상식 프로그램 부분에 나는 이미 [더 커뮤니티: 사상검증구역]을 후보로 슬쩍 올려놓은 상태다. 하반기에 이 프로그램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발견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좋을 것이다. 그럼 이제 선택은 여러분의 손에 달려있다. [더 커뮤니티: 사상검증구역]을 시청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포기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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