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연말결산
1. 올해의 책 : 『상실』, 조앤 디디온 / 『오믈렛』, 임유영 / 『즐거운 어른』, 이옥선 /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올해는 총 26권의 책을 읽었고 이 중 7권을 종이책으로, 나머지 19권의 책을 이북으로 만났다. 독서편식을 줄이고 새로운 작가를 만나보자는 작년의 다짐처럼 올해는 익히 들어본 적 있지만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던 올리비아 랭, 마거릿 애트우드, 조앤 디디온과 같은 해외 여성 작가들의 책을 부지런히 찾아 읽은 한 해였다.
친구에게 선물 받아 처음으로 시집 한 권을 완독했고 소설 부문에서는 『마르타의 일』을 시작으로 박서련 작가의 소설을 연달아 읽었으며 한국 소설가 중에는 최진영, 서수진, 김혜진 작가를 처음으로 만났다. 어떤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이야기이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연말에 우연히 만난 건 행운이었고 76세 전업 주부로 올해의 신인상을 거머쥔 이옥선 저자의 『즐거운 어른』은 알싸하고 유쾌한 맛으로 올해 가장 즐겁게 읽은 책 중 한 권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화책을 다시 읽기 시작한 해였고 책장에 만화책 코너를 신설했다. 많은 선생님들의 추천작 『여학교의 별』은 너무나도 취향이었고 마찬가지로 이미 유명했지만 읽어보진 않았던 『정년이』를 친구 추천으로 완독했다. 특히 후반부가 좋아 8권~10권을 여러 번 읽었다. 애니로 먼저 만났던 『장송의 프리렌』을 원작으로, 쿠이 료코의 『던전밥』을 시작했으며, 충동구매로 구입한 『룩백』은 영화 관람으로 이어졌다.
2. 올해의 영화 : [플라워 킬링 문], 마틴 스코세이지 / [듄 파트 2], 드니 빌뇌브 / [아노라], 션 베이커 / [더 룸 넥스트 도어], 페드로 알모도바르
총 24편의 영화를 보았고 이중 20편을 영화관에서 만났다. 올해는 연초에 만난 [플라워 킬링 문]을 시작으로 하마구치 류스케의 [해피 아워],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같은 러닝 타임이 긴 영화들을 유독 많이 만난 해였다. 이 3편의 러닝타임은 각각 206분, 328분, 237분이다.
'플라워 킬링 문'은 오세이지족 언어로 키 작은 꽃에 그늘을 드리우게 하는 키 큰 꽃이 자라나는 시즌을 뜻하는 말로 영화 전체적인 내용(오세이지족과 백인의 관계성)과도 너무 딱 맞아떨어지는 제목이었다. 디카프리오의 연기는 [레버넌트] 이후 가장 인상적이었고 몰리역을 맡은 릴리 글래드스톤은 반대편에서 묵직하게 무게 중심을 잘 맞춰주었다.
한국 휴가 시즌에 마침 [듄 파트 2]가 개봉하여 용아맥에서 다시 듄을 만났다. 파트 1이 듄의 세계관을 친절히 설명해 주며 폭풍 전야의 고요함을 보여줬다면 2편은 시원하게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 맛이 있었다. 영화가 충격적으로 좋아서 가슴이 뻐근한 게 얼마만이었는지. 파트 1에선 압도적인 자태를 뽐내던 모래벌레가 출퇴근용 우버로 전락한 것이 너무나도 우스웠지만 2년 내에 파트 3을, 가능하면 용아맥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그리고 허우샤오 시엔과 함께 대만 영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에드워드 양의 필모를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훑은 한 해이기도 했다. NSW Art Gallery에서 6월부터 8월까지 에드워드 양 회고전이 열렸고 한국에서는 개봉하지 않은 작품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어 테트리스하듯 부지런히 시간을 끼워 맞췄다. [타이페이 스토리], [공포분자], [하나 그리고 둘]을 포함해 총 7편의 작품을 만났고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영상미가 뛰어난 감독이라 어떤 씬들은 잔상처럼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올해의 엔딩상을 [아노라]에 주는 것에 많은 분들이 동의할것이라 생각한다. 엔딩씬에서 각각 다른 의미로 두 차례 눈물이 차올랐다. 그리고 [귀향] 이후 정말 오랜만에 [더 룸 넥스트 도어]로 극장에서 알모도바르의 영화를 만났다. 틸다 스윈튼과 줄리안 무어를 좇는 와중에 빨간색과 초록색의 아일랜드 테이블, 세이지와 레드 오렌지 컬러의 선베드, 비현실적인 로케이션, 아름다움 투성이었던 책상 안의 소품들, 그리고 키친에 있는 과일마저도 감독의 색이 선명히 드러나서 상영시간 내내 눈이 너무 바쁘고 행복한 영화였다. 죽음이라는 소재를 현실적이고 솔직하게 접근함으로써 젊은 층보다는 중년 이상의 사람들에게 아무래도 더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드니에선 개봉이 늦어져 작년부터 보고 싶었던 [괴물]을 마침내 한국 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었고 극장에서 관람해서 특히 좋았던 영화로는 [챌린저스]를 꼽고 싶다. 그리고 너무 보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보지 못 한 영화로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서브스턴스]가 있는데 언젠가는 볼 수 있는 질풍 같은 용기가 생기길. 그러기엔 저는 아직 [미드 소마]도 못 본 사람이긴 하지만요.
3. 올해의 드라마 : [눈물의 여왕], [파친코 2], [대도시의 사랑법], [더 베어 시즌 1]
한국인이 좋아하는 모든 요소가 들어간 종합선물세트였던 [눈물의 여왕]을 다른 사람들처럼 매주 챙겨봤다. 다음 화가 궁금한 드라마가 있고 그것을 매주 챙겨보는 즐거움을 오랜만에 만났던지라 후속작을 찾기 위해 다른 어느 해보다 드라마 찍먹을 많이 한 해였지만 여러 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완결까지 본 드라마가 다른 해에 비해 적었다.
처음 봤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드라마의 팬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다시금 상기시켜 준 [파친코 시즌 2], 그리고 무엇보다 [대도시의 사랑법]이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소설이 원작인 이 드라마는 박상영 작가가 직접 각본에 참여했는데 드라마가 좋아서 소설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고 주인공을 맡은 남윤수 배우, 심규호 역과 최미애 역할을 맡은 진호은, 이수경 배우가 기억에 남는다. 작년 올해의 드라마였던 [브러시 업 라이프]의 여파로 [종이달], [어제 뭐 먹었어?], [츠쿠타베]과 같은 유명 일드를 일부러 찾아봤다.
[더 베어]는 소문처럼 웰 메이드 시리즈였지만 퇴근 후 휴식용으로 보기엔 다소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드라마였다. 연말이면 항상 따스함을 전해주면 손난로 같던 드라마 [태드 래소]가 작년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고 방영 전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던 드라마 [정년이]는 시청하는 내내 가능하면 좋은 면만 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4. 올해의 여행 : 울룰루
2월~3월에는 한국과 치앙마이를 여행했고 엄마 칠순기념으로 모부와 함께 부산을 다녀왔다. 4월 이스터 주간에는 블루 마운틴으로 로컬 트립을, 9월에는 생일을 맞아 한국을 또 방문했고 2박 3일 여수/남해, 당일치기 대전 여행을 다녀왔다. 뒤늦게 한국 국내 여행의 묘미를 깨닫게 된 해였다. 그리고 11월에는 오빠, 조카 1호라는 다소 생소한 멤버 조합으로 울룰루 3박 4일 여행을 다녀왔다.
호주에 살면서 의외로 안 가본 해외 여행지로 발리, 로컬 여행지로는 울룰루를 꼽곤 했는데 후자를 갑작스러운 기회에 다녀오게 되었다. 9월 한국 여행을 마지막으로 올해의 여행은 마무리되었다고 혼자 생각하고 있었는데 삶은 역시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는 걸 실감했던 2024년이었다.
일인생활인으로서 오랜만에 규모의 경제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곁에 마음껏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있을 때의 아늑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여행이었다. 매일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서 일출을 보았고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일몰과 별 보기를 실컷 한 호사스러운 날들이었다. 해가 일찍 뜨고 늦게 지는 여름이라 하루가 30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올해 가장 바쁘고 즐거웠던 3박 4일로 기억될 것 같다.
5. 올해의 잔
22년에 시드니로 돌아오면서 가져온 잔들을 (개수를 늘리지 않은 채) 잘 사용하고 있었는데 올해는 갑자기 컵 선물이 쏟아진 한 해였다. 여름휴가로 스위스를 다녀온 친구에게 받은 마테호른 잔, 오랜 시간 고민하며 눈독 들였던 아라비아 핀란드의 루이자, 혈육이 사다준 점박이 법랑잔, 한국 휴가 가서 받은 스타벅스 북클럽 잔까지 총 5개의 컵이 새로 생겨서 커피/차 라이프가 풍요로워진 한 해였다.
6. 올해의 저축과 투자
항상 손절보다 익절이 더 어려운 사람이었는데 어느새 시간이 흘러 조금씩 쌓인 경험을 토대로 이제 어느 정도 선에서 과감히 익절을 실현할 수 있게 되어서 조금 성장한 기분이 드는 한 해였다. 연초부터 꾸준히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했고 8월 5일에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에 따른 증시 폭락을 다시 한번 경험하며 리스크를 낮추기 위해 예금, etf, 주식으로 자산을 분산시키는 것에 힘쓴 한 해였다.
7. 올해의 음식 : 엄마표 겉절이와 수육, 새우 루꼴라 파스타, 곤드레 솥밥
한국에서 가져온 엄마표 겉절이로 행복한 한 해였다. 겉절이 덕분에 어느 해보다 수육을 많이 삶았고 그래서 이제 무수분 수육 마스터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엄마표 김치 덕분에 밀키트/외식을 줄이고 집에서 집밥을 많이 해 먹었고 한 번 꽂히면 질릴 때까지 해먹은 습성으로 애호박 새우젓 파스타와 새우 루꼴라 파스타(현재 진행형)를 자주 요리했다. 이제는 왠지 모르게 연말 요리로 자리매김한 샤브샤브를 올해도 연휴에 부지런히 섭취했고 홍영의 대게백간장과 함께 계란찜 성공, 그리고 곤드레밥을 처음으로 만들어봤다.
8. 올해의 물건 : 28인치 러기지, 탁상용 선풍기
10년 가까이 사용한 24인치 러기지가 수명을 다해서 28인치 러기지를 아빠에게 선물 받았다. 주로 한국 겨울에 휴가를 가다보니 부피를 줄이는 것에 적지 않은 수고가 들었는데 28인치 러기지의 쾌적함이란 신세계에 가까웠다. 그리고 면세점에서 탁상용 선풍기를 구입해 왔는데 디자인도 성능도 마음에 들어 이번 여름 내내 잘 사용할 것 같다. 가능하면 살림살이를 늘리지 말자는 주의인데 꼭 필요한 물건은 삶의 질을 수직 상승시켜 준다는 교훈을 다시금 얻게 해 준 물건들이었다.
9. 올해의 인물 : 한강, 민희진, 안귀령
10월 10일 밤에는 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으로 기뻐서 잠이 오지 않았다. 민음사TV 라이브를 시청하는데 예상치 못한 소식에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박수를 치는 해외문학 편집자들과 태극기를 띄우는 엔딩으로 라이브를 종료하는 모습에 그저 웃음이 나왔고 트위터는 오랜만에 명절을 맞은 듯 축제 분위기로 물들었다. 한강 작가와 함께 올해의 인물로는 (역시) 민희진과 BBC 올해의 사진으로도 뽑힌 안귀령 대변인을 꼽고 싶다.
10, 올해의 말
세상은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 한강
11. 올해의 동물 : 그 시각 남태령에서 가장 귀여웠던 생명체, 뚱주, 희동이, 호두
12. 올해의 깃발 :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 국민이 주인이다, (내향인), 불꽃남자 정대만
13. 올해의 피켓 : TK의 콘크리트는 TK의 딸들에 의해 부서질 것이다
14. 올해의 사람들
한국 휴가 가서 시위 나간 사람들, 여의도로 남태령으로 광화문으로 말벌 아저씨처럼 뛰쳐나간 모든 분들과 각자의 방식으로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연대를 해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올해는 혼자만의 시간을 적극적으로 확보하는 와중에 틈틈이 사람들과 어울린 한 해였다. 12월에 있었던 여러 사건들은 주변인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떤 말과 리액션, 행동은 한 사람을 다시 보게 만들기도 했고 반대로 커다란 실망감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비슷한 취향을 갖고 좋아하는 걸 함께 하는 것도 좋지만 내겐 같은 주제에 대해 비슷한 견해를 갖고 화내고 분노하고 슬퍼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2024년이었다. 올해는 이런 사람들과 더 시간을 보내고 재밌게 사는 것에 집중하려고 한다.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