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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동쪽으로 해 질 녘에는 서쪽으로

길리/발리 여행기 두 번째

by Ronald
빅 브렉퍼스트와 샥슈카

길리에선 위치가 좋고 가격이 저렴한 숙소에서 묵었다. 처음에는 거북이를 보러 가기 좋은 동쪽으로 숙소를 잡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역시 혼자 하는 여행은 접근성 좋은 곳이 최고라는 생각에 항구 근처에 있는 숙소를 예약했다. 주로 아침에 모험을 떠나면 저녁이 되어서야 숙소에 돌아오는 타입이다 보니 너무 비싸지 않고 깔끔한 곳을 선호하는 편인데 여기는 항구에서 도보로 5분 거리라 마차로 이동할 필요 없이 그냥 러기지를 밀고 걸어가면 됐고 객실도 깨끗하고 직원들도 친절해서 3박 4일 동안 기분 좋게 머무를 수 있는 곳이었다.


조식을 먹으러 아침에 식당으로 가면 메뉴판을 주는데 그중에 빅 브렉퍼스트 메뉴를 제일 많이 먹었다. 호주에서 자주 시켜 먹는 브런치 메뉴라 친근하기도 했고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양도 푸짐하고 구성도 알찬 메뉴이기 때문이다. 이 날은 네 시간짜리 소그룹 스노클링을 예약해 놓은 터라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약속 장소인 항구로 출발했다.



스노클링 시작 시간은 오전 7시 30분. 스노클링 가이드는 영상과 사진을 잘 찍기로 유명한 분을 한 달 전에 미리 예약했다. 처음에는 적은 인원으로 움직이니 좀 더 바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나 했는데 스노클링을 하기 좋은 스팟은 이미 정해져 있어서, 전날 투어로 들렀던 곳과 큰 차이는 없었다. 대신 이 날은 그룹 내에 프리다이빙을 하는 분이 계셔서 우와우와 하며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고 가이드분이 덕다이빙 하는 방법을 몇 번이나 가르쳐주셔서 조금 감동해 버렸다. 전날 스노클링 투어에서도 중간중간 혼자 연습해 보았으나 잘 되지 않았는데 이날 가이드의 도움으로 4미터 정도 들어간 것에 저는 매우 만족했습니다. 다음날 체험 스쿠버 다이빙도 해봤는데 이 날 경험으로 인해 오히려 프리다이빙 쪽에 관심이 생겼다.


전날은 투어, 이날은 소규모 스노클링을 해보니 각각의 장단점이 있었는데 둘 다 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길리 여행을 계획하면서 아침 일찍 동쪽 바다로 가면 거북이를 쉽게 볼 수 있고 스노클링 하기도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잠시 혹하였으나 혼자 바다에 들어가는 건 아무래도 위험해 보였고(찾아보니 사고 경험담도 심심찮게 보였다.) 머무는 기간도 길지 않아 이렇게 프로그램으로 이용하는 게 오히려 효율적인 부분이 있었다.



사진만 다시 봐도 숨이 턱턱 막히는, 끝이 안 보였던 바다

투어와 소그룹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결국 사진과 동영상에 얼마나 무게를 두느냐였는데 가이드분이 끝내주는 영상을 찍어주신 덕에 길리에서 인생 동영상을 건져버렸다. 평소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만 찍히는 건 익숙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데 이 사람이 저 맞나요? 싶을 정도로 괜찮은 부분만 쏙쏙 뽑아서 만들어주신 편집본이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나중에 엄마에게 영상을 보여줬더니 이게 너 맞냐며 딸도 못 알아보셨고 회사 동료들에게 보여줬더니 최고라며 이런 건 회사 전체 이메일로 보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퐝 터졌다. 가이드에겐 감사의 말을 가득 담아 메시지를 보냈다.



생선구이 추가 옵션이 시급합니다

이후에는 같이 스노클링을 한 사람들과 생선구이로 유명한 집에 가서 나시고랭과 생선구이를 먹었다. 와.. 근데 기름에 튀긴 바삭바삭한 생선구이도, MSG의 맛이 느껴지는 나시고랭도 너무 입맛에 딱이라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웠다. 결국 이 메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서 다음 날에 또 방문했다. 네, 길리 또간집 되겠습니다.


여행과 사랑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평소라면 하지 않을 것들을 선뜻하게 된다는 점이 조금 그렇다. 일상 속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않을, 이동 중에 옆자리에 앉은 낯선 사람과 대화하기 같은 것들이 가능해지는 걸 보면 스스로가 누구세요? 싶은 순간들이 여행지에선 분명 있으니까.


그래서 여행지에선 낯선 이들을 만나는 게 조금 즐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고 잘 모르는 이에게도 선뜻 친절을 베풀고 투어를 마친 후 끼니를 함께 하기도 하지만 마지막엔 남은 여행 잘하시라며 (연락처 교환 없이) 담백하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는 점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스노클링이 너무 만족스러웠고 맛있는 점심도 먹은 탓에 콧노래를 부르며 숙소 근처 마사지샵에 들러서 발 마사지를 받았다. 어제 갔던 마사지샵에선 전신 마사지를 받았는데 그중 발마사지가 너무 시원해서 역시 마사지의 최고봉은 발마사지다..! 하며 이 날은 다른 집에 가서 발마사지만 받았는데 생각보다 실망스러워서 살짝 시무룩해졌다. 역시 인생은 업앤다운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슬슬 시계가 오후 4시를 가르키고 있어 선셋을 보기 위해 서쪽으로 향했다. 길리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침에는 거북이를 보기 위해 동쪽으로 떠나고 해 질 녘에는 선셋을 보기 위해 서쪽으로 향한다. 도보로 20분 정도 거리라 걸어가기로 했는데 석양 시간에 맞춰 서쪽에 있는 가게들도 슬슬 영업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중 빈백이 편안해 보이는 가게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한 30분 정도 지나니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 찼다. 아침에는 동쪽으로 해 질 녘에는 서쪽으로 향하는 삶은 얼마나 단순하고 아름다운지.



길리 노을 극장

본격적으로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니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저 멀리 아궁산이 보이고 발갛게 물드는 하늘과 함께 시간이 흐르는 모습을 천천히 지켜보고 있으니 이걸로 됐다는 생각. 이런 풍경을 봤으니 오늘은 더 이상 다른 게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의 일정을 선셋으로 마무리하고 싶어 이 날은 조금 일찍 숙소로 돌아와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따뜻한 물로 긴 샤워를 하고 스노클링에서 찍은 동영상을 여러 차례 돌려봤다. 내일은 아침 일찍 배를 타러 갈 일도 스노클링을 하러 가지도 않으니 실컷 늦잠을 자야지. 길리의 두 번째 밤이 그렇게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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