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빨래하는얼룩말 Jun 27. 2022

엄마는 내 아이의 추억으로 살아간다

<우리사이 모든것이 - 한무숙>


  숨죽이며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두어 번은 더 읽었다. 

아무런 배경 지식이 없는 채로 첫 구절을 맞이 했다 

- 용기 영전에 

용기는 뭐고 왜 갑자기 영전은 튀어나와? 하며 읽어 내려간 것이 

아들을 먼저 보낸 어머니가 아들에게 고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고, 순간! 죄스러웠다. 

감희 상상도 이해도 할 수 없는 크나큰 슬픔이다.      


나의 상황이라면 하면서, 잠시 감정이입을 하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이 붉어져, 

자칫 하다가 내 감정까지 추스르지 못할 지경인데, 

그걸 겪어낸 어머니는 어찌 맨 정신에 올곧게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어머니가 그래도 정신 붙들고 남아 있는 것은 남겨진 가족을 위해서였을 것을, 

나는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어머니를 유난히도 따르고 챙겼던 막내아들이 세상을 떠났다. 

겨울에 얼어붙어있던 차디찬 타지 땅에서 부모도 없이 내 사랑하는 아들이 외롭게 세상을 떴다. 

그것만으로도 억장이 무너진다. 

어머니는 아들이 떠난 그 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세상을 떠나던 그 순간에 엄마는 한국에서 친구에게 초대를 받아 함께 식사를 하고 웃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시간만 되면 어미는 가슴이 미어진다. 


내 새끼는 차디찬 땅에서 그렇게 죽어갔는데, 지금도 그렇게 차디찬 땅에 누워 있는데 흙 이불이 답답할까 염려되고, 비까지 내리면 얼마나 추울까 한다. 어미는 따뜻한 이불속에 있는 것조차 역겨워 굳이 일어난다.      

내 새끼 어릴 적, 잠을 뒤척이다 행여 이불이라도 발로 차 제치면 그 움직임에 잠에서 깨, 추울세라 이불을 다시 덮어주는 어미의 마음을, 

찬 바람이 부는 날, 내 새끼 추울까 내 온몸으로 바람을 막으면서도 내 새끼를 내 품 안에 품는 것이 엄마다. 

나도 유독 추위 앞에서는 손발이 분주해진다. 


아이들의 옷을 여미는 것도, 손수 이불을 덮어 주는 것도, 옷이라도 한 겹 더 입히려고 부산 떠는 것은 

아이들이 행여라도 추위에 덜덜 떨게 될까 봐 그게 그렇게 마음이 간다.      

어미는 아들을 추억한다. 


미국으로 공부하러 건너간 의사 아들을 보러 떠났다. 아들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아들이 어머니가 오면 함께 방문할 곳을  미리 알아두었다가 어머니를 모시고 간다. 


사실, 본인도 낯설다, 운전도, 그렇게 여유롭게 식사를 하는 시간도, 낯설다. 

하지만 멀리서 온 어머니께 좋은 경험을 시켜 드리고 싶어 애쓴다. 

정작 본인은 병원에서 밥 먹을 시간도, 잠잘 시간도 없었으면서 마음을 쓴다. 

여유로운 척했지만,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자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너를 보는 어미의 마음은 어찌했으랴.      


내가 지금 내 아이들에게 매일같이 음식을 해 먹이는 건, 

그 작은 입에 내가 만든 음식이 들어가, 오물오물 씹으면서 ‘엄마 맛있어요’라고 엄지를 세워 주는 것,

내 새끼 배 곪을까 봐. 

지금도 우리 아이들은 엄마를 한 번에 깨우는 법을 안다. 

‘엄마 배고파요’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졸린 눈 비빌 새도 없이 냉장고 문을 열어 쭉 훑는다. 


엄마가 되고 보니 비로소 ‘니들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라는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란 그런 존재다

내 새끼 추울까 절절 매고, 내 새끼 배 곪을까 노심초사하는 게 어미다. 

본능적으로 보호하고 본능적으로 먹이려는 게 그게 엄마다. 


그런 내 살 같은 내 새끼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외로이 세상을 떴다. 

그 슬픔은 허망함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고 알 수 있으리랴     

가끔 내 큰 아이는 내게 묻는다. 

엄마 나는 언제 돌아가요? 아직 어려 돌아가신다는 표현을 제대로 쓸 줄 모를 뿐이지만 

언제 죽느냐는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그건 아마도, 죽음이라는 슬픔에 대해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해 그런 거리라. 


우리 아이는 키우던 사마귀가 죽어도, 키우던 물고기가 죽어도 잠시 섭섭해하고 말더라. 

그래서 한번 물은 적이 있었다. 슬프지 않냐고, 

“좀 슬프긴 하지만 괜찮아” 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왜?” 했더니, 

“우리는 죽으면 다 하늘나라 가서 다 만날 수 있잖아. 그래서 괜찮아” 한다. 

우리 아이에게 죽음이란 그저 재회일 뿐이었다. 

하늘나라 가면 다 만날 텐데 엄마는 왜 슬프냐고 되려 되묻는다. 

“그래, 그게 슬플 필요가 없네?” 하며 미소 지었다. 


죽음이 슬픈 건 이별의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걸 못 견뎌서 슬픈 건가 보다 싶었다. 

그걸 겪어야 하는 사람이 오롯이 견뎌야 하는 시간이 너무 괴로워 힘든 건가 싶었다.      

나도 내 아이들의 엄마이면서 다시 나의 행동들을 돌아보았다. 

자다가도 아이들이 추울까 싶어 몇 번이고 깨어 아이들의 이부자리를 챙기거나, 

손발이라도 차가워져 있으면 얼른 내 품으로 옮겨와 나의 체온을 나눈다. 


나의 따뜻한 손으로 아이의 찬 발을 오래 잡아두거나, 차가워진 배를 내 손으로 덮어 두거나, 

그렇게 아이가 빨리 따뜻해 지기를 기다린다.      

첫 아이를 낳았던 경험은 잊을 수가 없다. 

겪어보지 못한 통증은 둘째 치고, 어디에 어떻게 무슨 힘을 주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나는 아이를 빨리 밀어내야 한다는 마음에 안절부절 이었다.  

“엄마, 그렇게 아니고요” 

“엄마, 소리 지르면 안돼요” 

“엄마, 화장실에서 큰일 보듯이요” 


내 아이의 출생이 내게 달렸다는 큰 사명감과 책임감에 나는 수치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내가 낼 수 있는 온 힘을 다해 내 새끼를 내 품 밖으로 밀어내던 그때의 감정과 느낌은 잊을 수가 없다.     

선생님들이 뛰어다니시던 분주하던 분만실, 뭣도 모르고 속옷도 없이 다리를 벌리고 누워 내 위로 내리쬐던 따뜻하고도 강한 조명,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통증, 뭘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도 그저 그 마음에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 거리고, 두려웠다. 

하지만 그 무서운 고통을 나 홀로 끌어안아야 했다. 그래야만 비로소 내 품에 있던 내 새끼를 볼 수 있다.


내 새끼를 보겠다는 생각만으로 나는 부들거리며 온몸에 힘을 주었고, 그렇게 수십 분이 흐른 후에야 나는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뜨거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새끼다.     

그때의 나는 그저 엄마였다. 남자 선생님 앞에서 내 음부를 드러내고 있다는 게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고, 오로지 이 아이가 괜찮은지 누워서 시선을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내 새끼를 선생님들이 먼저 안았다. 얼이 나가 있는데, 아기 손가락 발가락을 확인해 주시고, 

아이를 닦으며 울게 했다.

아이의 몸무게를 재고 피로 얼룩진 아주 작은 모자를 하나 씌워주시곤, 아이를 내 품에 안겨주셨다. 

이것이 나와 내 새끼의 첫 만남이었다.


그렇게 내 품속에서 열 달을 품었고, 나는 그렇게 내 아이와 첫 만남을 가졌다. 

이런 첫사랑이 있겠냐 싶을 만큼 나는 내 아이에게 빠졌고, 

사랑한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만큼 처음 본 내 아이를 사랑했다.

처음 만났지만 내 모든 걸 줄 수 있겠다 싶은 유일한 존재였다..

그저 탯줄 하나로 나와 연결되었던 아이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세상에 나왔고, 

나는 엄마가 되었던 것이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것이 터져 나왔고, 나는 힘이 든 건지 정신이 나간 건지도 제대로 못 느끼면서 아이를 바라보았다. 

내 가슴에 올려둔 아이들 보며 의사 선생님께 처음으로 여쭌 건, 진이 빠진 채로 울먹이며 ‘아기 추우면 어떡해요?’였다. 신생아였던 내 아기는 내 손바닥 두 개면 몸이 다 감싸 졌는데, 나는 그 와중에도 손바닥을 최대한으로 펼쳐 아이를 덮고 있었다.     

아이를 처음 나 홀로 보고 있을 때도, 

아기가 배고플까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젖이 남들만큼 돌지를 않아, 아이가 양껏 먹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이었다. 

나는 입이 짧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젖이 돈다는 음식이라는 음식은 닥치는 대로 먹었던 기억이 난다. 

우족이 좋대서 달여두었던 그걸 하루에도 몇 번이고 마셨고, 

옥돔을 푹 고와 국으로 만든 것도 하루가 멀다 하고 먹어치웠다. 

모유 차라고 유명한 허브티도 하루에 몇 잔이고 마셔대었다. 

그땐, 가릴 게 없었다. 내 새끼 배 곪을까 그게 가장 큰 걱정이었다.

유난히도 젖 도는 게 힘들다고 전문 마사지 선생님까지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는데, 


나는 끝까지 빈 젖을 유축하고 유축해 결국에 두 달 만에 젖이 돌았다. 

아이를 먹일 만한 충분한 젖이 나올 그때 나는 울었다. 

내가 대견해서가 아니라, 이제 내 새끼 배 곪지 않겠구나 싶었다. 안도감이었다.      

이제 여섯 살이 된 내 아이가 가끔 묻는다. 


“엄마, 나는 몇 살까지 살아요?” 하며 이 세상 끝나는 게 언제인지를 묻는다. 

아무렇지 않은 척,“응 진우는 백이십 년 살 수 있고, 엄마는 백 년 살 수 있어” 하며 대답은 해주는데, 내 새끼와의 이별을 상상만 하는데도 나는 왜 마음 한편이 아려오는지 알 수가 없다. 

나와 함께한 시간이 6년밖에 되질 않는데도 

아직 가까워지지도 않은 머나먼 이별을 상상만 하는데도 가슴이 이렇게 먹먹하고 감히 상상조차도 되지 않는데, 실제로 내 새끼를 먼저 보낸다면 ‘나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저승에서도 어린 자식을 다 못 키우고 온 어미는 꽃을 자식처럼 키우는데, 

꽃이 시들거나 죽으면 이승에 있는 자식이 아프거나 무슨 일이 난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서글프게 울고 있는 거라고 저승에 있는 어미는 아무런 손도 써보지 못하고 시들어 가는 꽃을 보며 통곡만 할 뿐이다 


저승으로 온 어미는 죽어서도 이승에 두고 온 자식의 걱정으로 저승에서 조차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주인공은 아들을 보냈다, 장성한 아들을 보냈다. 속 섞인 적 한번 없고, 

부모님께 기쁨과 행복감만을 선사하려고 했던 누구보다 속 깊은 아들을 보냈다. 

누구도 그 슬픔을 위로할 수 없고 감히 가늠할 수도 없다. 


다만 같은 슬픔을 겪었던 이들과 슬픔을 공유하고 조금이라도 덜어낼 뿐이다. 

같은 일을 겪은 이들은 입에 담기조차 힘든 그 일을 내뱉고 또 내뱉어낸다. 

단지 한 번만 하고 말기에는 너무도 원통한 사연이라 그럴까.      

어미는 그저 아들이 보낸 마지막 편지에 받는 이 없는 답장을 할 뿐이다. 

부모를 두고 먼저 떠난 자식을 불효라 하고 전생에 원수라고 한다 했다. 그렇게 비탄과 원통으로 마음 아파하게 하는 것으로 원수를 갚는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위로를 늘어놓는다. 

어미는 너를 키웠던 추억으로 너를 기억한다.


미워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더욱 아프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어미다.      

형은 너를 보내고 한참이 지나서야 너희 마지막 모습을 내게 묘사해주었다. 

작은 상처뿐이었고, 너는 그저 잠이든 사람처럼, 그렇게 있었다고 머나먼 이국땅에서도 사랑받았다고 내게 작은 위로를 건넨다. 

아무도 잘못한 사람은 없는데, 어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마음을 추스르고, 아들에 대한 진정한 명복을 빌 뿐이다. 


지금 내 아이와의 추억을, 사랑을, 더 깊이 느끼고 아껴야 한다는 것을 마음으로 알게 했다. 

마음에 여운이 아주 많이 남는 그런 이야기를 접한 것이다. 나는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를 잃어버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